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가운데)이 11일 현직 미 국무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히로시마(廣島) 평화기념공원을 방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있다.

2차대전 승전국이자 핵 보유국인 미국·영국·프랑스의 현역 외무장관이 종전 후 71년 만에 처음으로 원폭 피해자를 기리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해 위령비에 헌화했다.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외무장관회의에 참석 중인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 등 각국 장관들은 11일 오전 히로시마 피폭의 상징인 평화공원을 찾았다.

특히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당사자인 미국의 현직 관료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케리 장관 등은 피폭 당시의 참상을 전하는 공원 내 원폭 자료관을 참관하고 나서 위령비 앞에 나란히 선 채 헌화하고 묵념했다.

이들은 이어 일본 2차대전 패전의 상징물 격인 '원폭 돔'(옛 히로시마 물산진열관)을 방문했다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원폭 돔 방문은 애초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케리 장관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1915년 4월 개관한 물산진열관 건물은 미군의 원자폭탄에 의해 돔 부분의 철골 골조와 외벽 일부만 남았다. 일본 정부는 종전 후 이 건물을 그대로 보존했고, 1996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됨에 따라 핵무기의 참혹한 피해를 보여주는 상징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케리 장관은 평화공원 방문에 앞서 기시다 외무상과 회담한 자리에서 "평화의 중요성과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강한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없앨 수 있기를 희망하는 순간"이라고 이번 방문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또 "과거를 다시 논의하고, 스러져간 이들을 예우하지만 이번 방문은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다"며 "이것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케리 장관의 이런 발언은 그의 히로시마 방문이 미국의 원폭 투하에 대한 사죄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기시다 외무상은 이번 방문을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기운을 다시 고조시키기 위한 역사적 한 걸음"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폭이 떨어진 곳과 가까운 히로시마 시 중심부에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아 1954년 조성됐다. 이곳에서 매년 8월 6일 평화기념 행사가 치러진다.

미국은 2차대전 후 65년간 히로시마 원폭 관련 행사에 미국 정부 대표를 파견하지 않다가, 2010년 8월부터 현직 주일 미국 대사를 히로시마 위령식에 보내고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오는 5월 G7 정상회담 때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까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하도록 하는 게 일본 정부의 목표다.

아베 정권은 케리 장관의 공원 방문을 계기로 피폭의 참상을 전하고 핵무기의 비인도성을 호소함으로써 핵 군축과 핵 비확산의 동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일 간 견고한 유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베 정권이 2차대전 패전의 결과인 '평화헌법'의 개정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케리 장관의 평화공원 방문 행보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가해'를 희석시키고 '피해'를 부각시키는 결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G7 외무장관들은 회의 마지막 날인 이날 핵 군축과 핵무기 비확산 문제를 논의하고 나서 그 성과를 담은 '히로시마 선언'과 공동성명 등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