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가 단체로 시간 여행이라도 다녀온 걸까. 여행지는 경성(京城)이다. 시작은 지난해 흥행에 성공한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었다. 올해 개봉을 기다리는 경성 배경의 영화는 총 네 편이다. 박흥식 감독의'해어화'(13일 개봉)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김지운 감독의 '밀정' 그리고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이다.

◇경성, 빛과 그림자가 함께한 시공간

영화‘해어화’는 양장을 입은 가수(천우희·오른쪽 큰 사진)와 한복을 입은 기생(한효주·왼쪽 아래)이 공존하는 경성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두 도시 이야기' 중)

찰스 디킨스 소설의 첫 문장은 경성의 매력을 묘사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경성은 상반된 것들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조선의 전통과 서구의 신문물이 충돌하자 경성은 격변기를 맞았다. 일제강점기의 우울하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유 연애와 소비 문화의 달콤한 흥분이 싹트기 시작했다. 극적 상황을 연출하기에 좋은 요건을 갖춘 셈이다.

영화 해어화는 경성이 갖는 모순을 십분 활용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동무'라던 두 여자의 관계는 한 명이 정가(正歌)를, 다른 한 명이 가요를 부르면서 틀어진다. 정가를 부르는 예인(藝人)은 한복을 입지만, 가요를 부르는 가수는 원피스를 입는다. 박흥식 감독은 "모던걸이 드나들던 사교 클럽과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을 영화에 함께 담았다. 미술이나 의상을 화려하고 풍부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고 했다.

영화에서 상투와 중절모, 하이힐과 버선을 한 화면에 드러낼 수 있는 시공간은 경성밖에 없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인 소설 '핑거스미스'가 영화 '아가씨'로 만들어지면서 배경이 경성으로 바뀌었다. 화려하지만 음습했던 빅토리아 시대와 대칭을 이룰 만한 것이 바로 경성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포스터에서 주인공 네 명은 각각 기모노와 원피스, 한복과 양장을 입고 있다.

◇경성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뿌리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불 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

경성인 구보씨의 어머니는 고등교육을 받고도 직장이 없고,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이 걱정이다. 박태원이 묘사한 경성의 풍경은 지금도 유효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세대 간 충돌은 여전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청춘이라도 멋을 내고 연애를 하며 마음을 설레여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경성은 지금 우리 모습의 가장 가까운 기원이다. 관객이 그만큼 시대와 인물에 감정이입하기 쉽단 얘기다.

6월 개봉 예정인 박찬욱 감독의 영화‘아가씨’.

[배우 한효주의 프로필]

경성은 근대화가 시작된 도시지만 압제와 저항의 도시이기도 하다.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악역은 자연스레 일본 관료, 일본군, 친일파의 몫이다. 여기에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암살'은 주인공이 친일파 아버지를 둔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영화에 비극과 긴장을 더할 수 있었다. 하반기 개봉 예정인 '밀정'은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그리는 영화다.

'경성 모던타임스'(문학동네)의 저자인 박윤석씨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방식, 즉 의식주와 사고의 뿌리는 경성이다. 경성에서 유행한 커피를 지금도 열광적으로 마시고 있는 게 그 예다. 우리의 욕망과 맞닿아 있는 사물이나 현상은 그때 생겨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