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7일은 서재필 선생의 '독립신문' 창간 120주년이자 제60회 신문의 날이다.

신문 발행은 일대 문화혁명이면서 개화 운동, 민주적인 정치 혁명의 실천이었다. 특히, 독립신문에 담긴 서재필의 선구적인 안목과 개화 사상을 중요하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만민평등 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정치 체제를 혁신해 문명 개화의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했다. 구습 타파, 의식 개혁, 국가 개조의 이상을 서민이 알기 쉬운 평이한 문장으로 설파했다.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사실을 압박받는 조선인들에게 가르쳤다(윤치호, 1898년 5월 19일자 영문판).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정부가 내거는 문화 융성, 창조 경제, 혁신과 같은 국가적 당면 과제도 표현을 달리해 120년 전 독립신문 지면에 실렸다.

서재필은 영문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국문 신문과 함께 발행했으므로 올해는 우리나라 영어 신문 120주년에도 해당한다. 하지만 한글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반에 덜 알려졌다.

영어 신문의 존재는 국제화의 상징이다. 그 나라의 실정을 외국에 알리는 국가 홍보 매체이며, 외국 사정을 국내에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한다. 중국에서는 1820년대에 서양인들이 처음 영어 신문을 시작해 1860년대가 되자 홍콩, 상하이, 톈진 등 서양인 거류지 항구 도시에서 일간지가 여럿 발행됐다. 서양인의 중국 진출 방편이기도 했고, 개방의 지표로 볼 측면도 있었다. 일본도 1861년에 나가사키에서 영어 신문이 처음 발간됐고 요코하마, 고베 등지에서 뒤를 이었다.

19세기 말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 사람이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열강 세력이 다투어 한반도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던 시기였지만 지배 계층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대외 교섭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영어 신문 발행은 국내 거주 외국인과 해외 구독자에게 직접 조선의 사정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는 조선의 입장을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 창간에는 정부의 도움이 있었지만,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신문을 성공적으로 발행할 인물은 서재필 아니고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서재필은 과거에 급제했던 조선의 양반 신분이었으나 일본에 유학해 군사 교육을 받은 군인이자 개화파였고,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하나였던 혁명가였다. 미국에 망명해 천신만고 끝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 최초의 미국 의사 자격을 얻었던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의 개척 정신과 불굴의 도전 정신 또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언론계는 1957년부터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제정해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초기에는 이날 하루 신문을 발행하지 않고 전국의 언론인들이 바쁜 가운데 신문 제작에 잘못은 없는지 겸허한 자세로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문의 날을 제정하던 당시와는 언론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언론은 해결하거나 극복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선각자 서재필의 언론 정신만은 시대가 바뀌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론의 귀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