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선 논설위원

뉴욕타임스가 지난 주말 미 공화당 유력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외교정책에 대해 집중 인터뷰한 후 전문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A4 용지 40장에 달하는 긴 인터뷰엔 희한한 발언이 넘친다. 그대로 실현되면 국제사회는 아수라장이 될 판이다. 오죽하면 백악관이 성명을 내고, 케리 국무장관이 동맹국들이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도 한 발 물러서긴 했다.

트럼프의 외교 사전엔 우리가 아는 의미의 '동맹'이 없다. 대신 '미국 우선주의'와 '다시 위대한 미국'이 있다. '트럼프식 외교'를 적용하면, 우리나라가 주한미군 주둔을 계속 원하면 미국에 방위분담금을 대폭 올려줘야 한다. 그게 싫으면 핵무장을 하면 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극단주의 무장세력 IS(이슬람국가) 격퇴를 위해 지상군을 파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미국은 사우디 원유를 더 이상 수입하지 않을 것이다.

주요 외교 현안에 대한 의견을 들은 후 뉴욕타임스는 사설에 "트럼프 생각 중 많은 부분이 앞뒤가 안 맞고 충격적일 정도로 무식했다"고 썼다. 놀라운 건 '충격적일 정도로 무식한' 트럼프의 외교정책이 나름대로 족보가 있는 얘기라는 점이다. 낙태, 의료보험 등 국내 문제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은 갈팡질팡해왔고 당(黨)도 민주, 공화, 개혁당과 무소속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외교정책만큼은 초지일관해왔다.

1987년 트럼프가 40대 초반의 성공한 사업가로 유명하던 시절,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에 약 10만달러를 내고 전면광고를 실었다.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의 광고에서 트럼프는 미국 외교정책의 실패를 지적했다. "수십년 동안 일본과 다른 나라들은 미국을 이용해왔다. 전 세계가 미국 정치인들을 비웃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지도 않은 배를 보호하고, 우리가 필요하지도 않은 기름을 운반한다."

이후 트럼프의 일관된 주장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국가들이 비용을 부담하게 해서 그 돈으로 경제를 살리고 어려운 미국인들을 돕자는 것이었다. 미국 보통사람 중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꽤 많다. 유세 중 트럼프가 하는 얘기가 반미치광이의 허튼소리 같은데도 여전히 공화당 후보 중 지지율이 1위라는 건 그의 주장이 공감을 얻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백악관이 펄쩍 뛰는 트럼프의 '한·일 핵무장 용인론'도 이미 워싱턴 싱크탱크에서는 거론됐던 얘기다.

역대 미국 대선에서 한국은 여러 번 주요 이슈가 됐다. 1952년 대선 때 아이젠하워는 당선되면 한국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한국전쟁 종결을 위해 "나는 한국에 갈 것이다"라고 한 말이 신문 1면 헤드라인으로 뽑혔다. 1976년 대선에선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굳이 미국의 고립주의 성향이 강해지는 시기란 표현을 쓰고 싶진 않다. 미국이 글로벌 수퍼파워로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버거워지는 순간이 있고 그럴 때 유권자들 사이에서 "미국이 왜 이렇게까지?"라는 속삭임이 설득력을 얻는다.

글로벌 수퍼파워로서 미국의 리더십은 동맹과 무역관계, 외교력을 바탕으로 힘을 발한다. 그런 현실을 무시한 트럼프의 발언이 황당하긴 하다. 하지만 한국이 안보를 미국에 크게 의존하는 처지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먹고살 만한데도 제 힘으로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로 보이는 것도 현실이다.

이번에 트럼프가 당선되든 그렇지 않든,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목소리는 또 나올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미국이 트럼프가 생각하는 미국처럼 변할 날도 올 것이다. 북한 급변 대책만 필요한 게 아니라 미국 돌변 대책도 필요한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그건 트럼프 같은 후보에게 "돈 더 내라"는 얘기 듣지 않는, 우리 힘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나라를 향해 한 발 더 내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