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겠다는 결심(Determination), 장애인을 넘어 내가 사회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성(Identity), 자신만의 기술(Skill)을 갖추려 노력한다면 장애는 충분히 능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준 가족

신순규 씨는 녹내장과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었다. 22번의 수술을 거쳤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부모님은 시각장애라는 이유로 안마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가 악보를 익히는 방법은 곡을 하루 종일 들으며 외우는 것이었다. 덕분에 한 번 들은 건 잘 기억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피아노에 매진하며 더 큰 경험을 쌓기 위해 열다섯 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러나 피아니스트의 길은 쉽지 않았어요. 음악적 재능도 부족했지만 흥미가 없었거든요. 부모님과 선생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 대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곡을 외우며 터득한 집중력으로 공부에 빠져든 그는 전국 장학생으로 하버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심리학 전공 후 MIT에서 경영학 석사를 밟으며 교수를 꿈꾸었다.

“장애인에게 장벽이 있는 직업을 연구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시각장애인 중 애널리스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제가 장애의 벽을 넘는 사례가 돼 보고 싶어 교수의 꿈을 접고 증권가로 뛰어들게 됐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금융 공인재무분석사(CFA)를 취득했다.

“출제위원회에서는 보안 때문에 점자 출제를 할 수 없다고 못 박았어요. 동료의 도움을 받아 계산기 버튼의 기능 하나하나를 배우고 익혔습니다.”

시험의 문제를 읽어주고 답을 써줄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붙여주는 조건으로 그는 시험을 치렀고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의 주된 업무는 증권 분석이다. 채권의 본래 가치를 조사하고, 분석과 계산을 통해 주식의 매입과 매매를 한다. 수많은 자료와 정보를 접해야 하는 그는 컴퓨터 사용 시 스크린 리더를 사용한다. 스크린 리더가 출력하는 것을 귀로 듣고, 점자판을 사용해 정보를 읽는다. 그는 애널리스트는 수많은 정보, 차트, 숫자 등을 봐야 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에게는 힘든 직업일 것 같다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숫자나 차트에 집착하기보다 기업이 가진 스토리텔링을 잘하는 것이 애널리스트의 능력인 것 같아요. 정보, 루머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분석을 하는 게 중요해요. 수많은 정보를 다 볼 수 없고, 루머 때문에 고생하는 과정을 스킵 할 수 있는 건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웃음).”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미국에서 그를 돌봐주었던 양부모님 덕이 컸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제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지 않겠다는 선생님의 집을 찾아갔어요. 갓난아기를 돌봐주기도 하고, 콩나물을 다듬기도 하는 등 선생님이 제게 레슨을 해 주겠다고 할 때까지 정성을 쏟으셨어요. 또 제 학업을 위해 점자로 된 전과를 구하려 노력했지만 점자 전과는 없었죠. 어머니는 인쇄물을 점자로 찍어 내는 곳을 수소문했어요. 여러 힘든 과정을 거쳐 전과와 참고서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미국에 와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양부모님의 도움이 컸다.

“미국의 양부모님은 제가 유학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제 영어 공부를 도와주신 분들이에요. 그게 인연이 돼 쭉 저를 자식처럼 대해주셨죠. 아버지는 제게 늘 ‘넌 장애인이 아니야. 유능한 사람이야’라고 얘기해주셨어요.”

그는 언제나 용기를 북돋워준 양부모님 덕분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 후 교내 뮤지컬 행사에 참여하는가 하면 2년 연속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감사는 운동과 같다

그는 미국 뉴저지의 작은 도시에서 맨해튼의 월가까지 매일 왕복 3시간의 거리를 출퇴근한다. 통근하는 기차의 정차 위치가 일정하지 않아 헤맬 때도 있고, 바삐 뛰어가는 사람들에 부딪혀 들고 다니는 케인(지팡이)이 부러진 적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그는 역 바닥의 느낌, 사람들이 오고가는 소리, 역 주변에 있는 도넛 가게의 냄새 등으로 자신의 위치를 예상해 길을 찾는다.

“길을 잃어도, 케인을 잃어버려도 괜찮아요. 아무리 혼잡한 가운데 있어도 제 위치만 알고 있다면 목적지에 가 닿을 수 있거든요. 이것이 바로 제가 삶에서 길을 잃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는 실의에 빠질 법도 한데 매번 꿋꿋이 이겨냈다. 그 비결은 ‘감사’였다.

“슬퍼하거나 불평해봤자 좋을 게 없더라고요. 감사는 운동과 비슷한 것 같아요. 계속 하다 보면 습관처럼 돼 쉬워지거든요. 불공평한 상황을 극복하게 해주는 ‘또 다른 날이 있을거야’ 라는 이 말이 제게는 마법과 같은 주문이었어요.”

신순규 씨는 컴퓨터 사용 시 스크린 리더가 출력하는 것을 귀로 듣고 점자판을 사용해 정보를 읽는다.

그는 부모님뿐 아니라 친구, 지인, 점자 교과서를 제작해주는 곳 등 그동안 자신이 받아온 배려를 세상에 다시 돌려주는 삶을 실천하고자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 혹은 난독증 학생들에게 녹음 교과서를 제공하는 단체인 러닝 앨라이 이사, 한국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유학 프로그램을 마련해 돕고 있는 YANA선교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큰 축복”이라고 말하는 그는 “비록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도 몇 번 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제가 시력을 잃은 시기도 적절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백일이 되기 전 녹내장에 걸려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 일곱 살이 될 때까지는 다른 아이들처럼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녹내장이 악화돼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예민해질 시기인 10대 이전에 잃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매사 긍정적인 그이지만 슬픈 적도 있었다. 22번의 수술을 받으면서 안대를 떼어낼 때마다 늘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엄마의 얼굴이 점점 잊혀져 갔을 때, 아내의 눈빛이나 표정을 볼 수 없을 때, 9년 만에 얻은 아들 데이비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다. 헬렌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는 날이 주어지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는 하루면 충분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시각장애를 이겨내고 마치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길 원하지 않는다. 장애는 그에게 극복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Disability)는 능력(Ability)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능력과 장애는 D, I, S 알파벳 세 글자 차이일 뿐이니까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겠다는 결심(Determination), 장애인을 넘어 내가 사회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성(Identity), 자신만의 기술(Skill)을 갖추려 노력한다면 충분히 능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장애 덕분에 그는 남과 다른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가끔 눈을 감아보세요. 마음으로 듣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대중매체나 소셜 네트워크에 사로잡히기 쉬운 환경 때문에 봐야 할 것을 정작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주위를 더 둘러보고 신경을 쓴다면 외로움으로 어두워진 배우자의 얼굴 혹은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눈빛 등 소중한 것을 생각하고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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