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박근혜 대통령은 나라를 뜨겁게 사랑한다. 그런 대통령을 뜨겁게 존경하는 '진실한 사람들'도 있다. '애국심과 존경심'의 사슬은 완벽하다. 그런데 이 사슬이 여당의 목을 죄고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은 그래서 떠오른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잘못된 선의' 중 하나로 여당, 친박계에서 '칼잡이 이한구' 책임론이 나오고 있다.

이한구, 김종인씨 같은 분이 출연하면, 방송 진행자들은 긴장한다. 김종인 더민주 대표는 진행자가 좀 황당한 질문을 하면 이렇게 받는다. "(경멸을 가득 담은 시선을 보내며) 그건 뭘 모르는 소리고!" 이한구 새누리 공천관리위원장도 "(확 째려보면서) 규정에 그런 거 있는 거 확인했어요?" 하고 면박을 준다. 많은 기자가 둘을 일컬어 '잘나도 너무 잘났으니까' 비아냥거리거나, "오만하고 거만하다" "취재만 아니면 피하고 싶다"고 뒷말을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오만'은 그 결도, 결과도 다르다는 지적이다.

'정치 알파고 김종인'이라는 별명이 막 붙으려는 찰나, 김 대표는 '셀프 2번 공천'으로 '뻑(버그)'을 냈다. 결근 이틀 만에 당에 돌아왔지만, '알파고도 화염병 세대에게는 못 배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전문가들은 "김종인이 언제 되치기를 당할 것인가" 그 시기를 점친다. 그는 해지면 버리는 바지사장에 불과하거나, 야당 오너 DJ의 3남 김홍걸씨 말처럼 '갈아치우면 되는 머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김종인이 당을 망쳤다'고 비난하는 소리는 별로 없다. 그는 이해찬, 정청래 같은 굵직한 인물을 자를 때, '주저흔(躊躇痕)'을 보이지 않았다. 주저흔이 없다는 얘기는, 치명상 주변에 너절한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 눈치 보며 잔머리 굴리지 않고 단번에 갈랐기 때문이다. 외려 야당 환부를 도려낸 효과를 냈다.

이한구 위원장은 말은 칼처럼 했지만, 칼은 엿처럼 썼다. 이한구의 칼은 상대를 베는 데는 성공했지만, 칼 쥔 손에도 큰 상처를 냈다. 칼 맞은 쪽은 자상(刺傷)에 불과했지만, 휘두른 쪽이 파상풍(破傷風) 걸리게 생겼다. 새누리당은 대표가 부산·서울을 오가며 항명(抗命) 로드무비 '도장 갖고 튀어라'를 찍었다.

이한구의 칼질은 왜 이리 엉망이 됐을까. 먼저, 국민은 이한구 위원장이 말은 독하게 했지만, 실은 '바지사장'도 아닌 그저 '청부업자'였다고 의심한다. 베려면 빨리 벨 것이지 칼춤을 질질 끌면서 포승에 묶인 죄인(유승민)에게 '네 손으로 목을 매거라'라고 주문했다. 정면승부를 피한 것이다. "나는 유승민을 자른다고 결론 냈다. 김무성 대표 빨리 결정해라." 여론에 맞서며 이렇게 선언하는 용기(?)도 보여주지 못했다. 속셈이 따로 있었을까. 벌써부터 '총선 후 청와대가 이한구 의원에게 한 자리 챙겨줄 것'이라는 얘기가 떠돈다.

두 번째, 개인 한풀이 설(說). 몇몇 의원의 이해 못 할 탈락을 두고는 "원래 이한구 의원이 싫어해서"라는 얘기가 나왔다. 세 번째, 그러면서도 남의 권위는 대체로 깔아뭉갰다. '공천원칙'을 주장하는 김무성 대표 말을 "바보 같은 소리"라고 평가했다(김 대표는 그날도 참았다). 그 당의 '정체성'이나 '의원의 품격' 기준에는 대통령에 대한 무한충성만 있나 보다.

하청업자의 과오는 결국 '원청(原請)업체'에 클레임이 폭주하게 만든다. 원청업체는 하청업체에 대금을 지불하지 않거나, 조만간 거래선을 끊어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청업체가 책임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원청업체는 애국심이라는 선의만 있었지, 그걸 이 시대에 맞게 조립하는 방식을 전혀 몰랐다. 지난해 6월25일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던 대통령의 읍소형 불호령 이후 딱 9개월 만인 25일, '친박'의 유승민 고사 작전은 실패로 결론이 났다. 원칙도 방법론도 잘못됐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친박이 '이한구 책임론'으로 면피하지는 못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