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밝았다. 모르는 어른이 지나가도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했다. 자기들끼리 대학 어디로 갈까 진로 얘기도 하고, 요즘 뜨는 한국 영화 '동주' 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교실마다 정면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 있고, 교장이 김일성 3대를 꼬박꼬박 "주석님, 장군님, 원수님"이라고 불렀다. '광명절'(김정일 생일) 기념 포스터와 '미국 제국 박살내자'는 구호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취재팀이 찾아간 도쿄 기타구 조선중·고급학교는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일본 속의 '미니 북한' 같았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10대들이 2016년 3월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로동당의 말단 기층조직은 당세포'라고 적힌 교과서를 배웠다. 여학생은 검정 치마저고리, 남학생은 일본식 검정 교복 차림이었다.

지난 2014년 일본의 한 조선학교에서 한복을 입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윤동주의 시를 가르치고 있다. 교실 칠판 위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 있다.

조총련 숫자가 53만명에서 8만명으로 쇠락하는 동안, 조총련계 조선학교도 같은 길을 걸었다. 1975년 일본 전역에 161곳이던 조선학교가 지금은 68곳 남았다. 학생 수도 4만6000명에서 6000명대로 쪼그라들었다.

그렇다고 조선학교를 얕보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건 '오판(誤判)'이라고 복수의 한국 정부·민단 관계자와 재일동포 연구자들이 말했다. 조선학교 덕분에 조총련이 동포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고, 지금도 조선학교가 조총련의 마지막 버팀목이란 얘기였다. 재일동포치고 가족 중에 조선학교 졸업생 없는 사람은 없다. 한국 사람들이 동창회 하듯 재일동포도 '오사카 조선학교 ○기' '고베 조선학교 ○기'끼리 뭉친다. 조선학교 네트워크에서 왕따당하면 동포 사회에 발붙이기 힘들다.

동포 사회가 아직도 조선학교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말 교육'이다. 민단계 학교는 일본 전역에 네 곳뿐이고, 동포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한국어 교육의 분량과 수준도 조선학교에 못 미친다. 재일동포 A(71)씨는 "조총련이 싫어서 딸들을 민단계 학교에 보냈더니 한국말을 못한다"며 "조총련은 싫지만 조선학교는 없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문제는 우리말 교육에 딸려오는 '북한 교육'이다. 올해 일본 모 조선학교 고급부 졸업생 B군의 교과서가 이 점을 한눈에 보여줬다. 가령 '현대조선력사' 과목은 1980년대 한국에 대해 군사독재,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 6월 항쟁만 크게 다루고, 그 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다는 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한국이 이룬 압축 성장은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 현상으로 일시 경기가 회복됐다"고 깎아내렸다. 반면 김일성 사망에는 전체 145쪽 중 4쪽을 할애했다. "온 나라가 피눈물에 잠겼다" "유엔 사무총장이 '력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고 성명을 냈다" "경애하는 장군님(김정일)께서 인민들의 심정을 헤아려 애도 기간을 연장했다"는 문장이 이어졌다.

조총련 관계자 집안에서 태어나 조선학교를 졸업한 30대 재일동포 C씨는 "쭉 그렇게 배우니까 어렸을 땐 산타 할아버지 보고 싶어 하듯 김일성 만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환상이 깨진 건 고3 때다. C씨가 조총련계 조선대학 대신 일본 대학에 가겠다니까 교사가 "자네는 반역자다. 부모님 직장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C씨는 "대학 하나로 '반역자' 소리까지 하는 교사들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C씨는 일본 대학에 진학해 전문직으로 성공했고, 지난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조총련 전문가들은 "조선학교와 조총련은 별도 조직이 아니라, 조총련 지도부가 직·간접적으로 조선학교 교육과정과 교원 인사를 좌우하며 철저하게 지배한다"고 했다. 이런 구조가 일본 내 혐한(嫌韓) 세력에게 빌미를 준다. 산케이 신문은 지난 4일 "전국 지자체들이 올해 조선학교에 총 32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보도했다. 이틀 뒤 극우파 일본인 시위대 80여명이 "일본의 평화를 위협하는 조선학교를 해체하라"고 외치며 도쿄 도심 긴자를 행진했다. 표면적으론 보조금 시위지만 한국에 대한 온갖 막말이 쏟아졌다.

북한은 1955년부터 최근까지 460억엔 넘는 돈을 조선학교에 지원했다. 취재 중 만난 여러 동포는 "조선학교에 문제가 많은 건 우리도 안다. 하지만 한국은 뭘 해줬냐"고 했다. 조총련계 조선대학 교수를 지낸 박두진(75) 코리아국제연구소장은 "정말 답답하다"고 했다. "최근 일부 한국 시민단체들이 수시로 조선학교 돕기 모금 행사를 벌입니다. 과거 정권 때는 심지어 한국 정부까지 국민 세금으로 지원금을 줬고요. 거기서 뭘 가르치는지 알고 하는 짓입니까." 동포 사회가 본국에 바라는건 조선학교 돕기가 아니라, 조선학교를 대체할 우리말 교육 시스템을 갖춰주는 일이란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