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 과정을 정리한 책은 많다. 한데 모아 놓고 보니 원인은 210가지로 정리됐다. 독일 학자가 알파벳 순서로 그 리스트를 만들었다.

거기엔 게르만족의 침략 외에도 무정부주의, 무기력, 만연하는 파산, 교만, 도덕적 이상주의 같은 것도 로마 멸망 원인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뜨거운 온천에서 목욕을 자주 하는 바람에 만연했던 고체온(高體溫) 신드롬까지 꼽혔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불황도 로마의 몰락 과정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조선업종의 불황은 유가 하락에서 비롯된 원인이 크고 철강 회사 적자는 중국의 과잉 공급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소비가 위축된 이유는 임금 인상이 저조하고 고령화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황 원인을 수백 개씩 꼽아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설혹 수백 가지 원인을 밝혀낸다고 해도 일일이 처방전을 내고 경기 흐름을 반전시킬 수도 없지 않은가. 한국의 나약한 힘으로 국제 원유 가격을 올릴 수 없는 것처럼.

집마다 불황이 다른 표정을 하고 있어 종잡기 힘들었던 것일까. 대통령은 경기가 풀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주범'으로 국회를 여러 번 지목했다. 책상을 열 번 이상 두드리며 성토하기도 했다.

지도자의 말에 따라 국민은 흔들린다. 국회를 공격 대상으로 지목하자 150만을 넘는 사람이 국회 성토 서명에 뛰어들었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가 이슬람교도의 입국을 막겠다고 공언한 것처럼 대중의 불안감을 자극한 선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상식적 지도자라면 불황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불황은 기본적으로 세계경제 침체에서 시작된 것이다. 세계시장이 위축되는데 14개월 연속 수출이 감소한 탓을 국회에 돌리겠는가, 아니면 재벌 기업을 탓하겠는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줄곧 세계의 평균 성장률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다. 먼 훗날 돌이켜보면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부터 장기 불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적 경기 침체를 무시하고 현 정부에만 불황 책임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경제가 풀린 뒤엔 우리도 달콤한 호황을 맛볼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낮다. 경기가 조금 호전되기는 하겠지만 호황에 들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한국은 이미 운명적 저성장 국면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정부가 답답한 것은 불황 탈출구를 잘못 짚고 있는 점이다. 대통령은 서비스산업 관련 법안, 노동 개혁 법안이 통과되면 일자리가 수백만 개 탄생하고 경기가 금방이라도 풀릴 듯이 말한다. 일본도 장기 침체에 빠지자 자질구레한 법안을 많이 만들고 고쳤지만 경제는 살아나지 않았다.

우리가 걸어 들어가고 있는 암흑의 골목도 일본과 다를 게 없다. 자잘한 법안 몇 개가 통과된다고 해서 탈출할 수 있는 수렁이 아니다. 지금은 경제 운용의 큰 방향을 돌려야 하는 시기다. 대통령은 물론 여야 지도자들은 그걸 잊고 있다.

우리가 정말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고쳐야 할 법은 1987년 헌법이다. 1987년 헌법은 우리 경제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넘어갈 때 제정됐다. 금융이 실물 경제를 지배하는 글로벌 경제를 예상하지 못했고, IT 혁명이 세상을 이렇게 뒤흔들 줄도 몰랐다.

경제 관련 헌법 조문을 보면 제조업을 집중 지원하는 반면 내수를 키우려는 전략은 없다. 농업 우대를 강조한 나머지 기업의 농업 기술 개발 투자를 막는가 하면, 인구 감소나 고령화로 경제가 쪼그라들 것이라는 고민도 없다. 나라 경제가 시대에 맞지 않은 헌법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막강한 관권(官權)을 보장한 헌법의 틀이다. 대통령, 행정부, 국회에 지나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국회가 법을 만들면 행정부도 시행령, 지침, 고시, 예시 등 온갖 이름의 행정명령을 제정할 수 있다. 그 결과 국회와 행정부가 경쟁하며 만들어 낸 규제 수만 개가 민간 부문을 옥죄고 있다. 기업이 큰돈을 쓰려면 공무원에게 잘 보여야 하도록 한 것이 우리 헌법의 권력 배분 방식이다.

그에 비해 민(民)이 국회·행정부를 견제할 장치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엉뚱한 권력 행사로 손해를 보아도 항거하거나 고칠 반론권·거부권이 없다. 관청이 민간 위에 군림하는 불균형 구조 아래서는 더 이상 경제가 성장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큰 것을 못 보고 여전히 작은 경제 법안 몇 건에 매달리고 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장기 불황은 적어도 10년 이상 피할 길 없어 보인다. 그저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