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뒷모습|세라 손튼 지음|배수희 옮김|세미콜론|584쪽|2만9500원

전시 기획하는 친구가 하소연한다. 이름만 대면 아는, 요새 한창 잘나가는 작가와 작품을 설치했단다. 야심한 밤, 작품을 걸던 작가가 갑자기 심심하다며 노래를 부르라고 했단다. 난감해했더니 작가는 '내가 누군데 그러느냐'며 격앙했다고. 그 작가에 대한 비슷한 얘기를 또 다른 미술계 인사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작가의 '앞모습'은 '뒷모습'과는 판이했다. 처세엔 능했고, 언론엔 겸손했다. 승승장구의 원천이었다.

'예술가의 뒷모습'. 책 제목을 봤을 때 친구의 푸념이 떠올랐다. 예술로 밥 벌어 먹고사는 이들에겐 귀가 번쩍 뜨일 제목이다. 물론 제 발 저릴 작가도 여럿 있겠다.

예술사회학자이자 '이코노미스트' '가디언'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저자가 2009년부터 4년 동안 미술가 130명을 인터뷰하고 그중 33명을 추려 만든 책이다. 사조, 철학, 관념 따위는 걷어내고 작가들의 민낯을 찾아나섰다. 목차 뒤 뜬금없이 나오는 세계 전도에는 비행기로 수십만 ㎞를 날아다니며 5대륙 14개국 출신의 작가를 만난 흔적 표시가 나온다. '손'과 '발'이 합작한 책이란 자부심의 표시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작품으로 도배된 표지가 저자의 포부 당당한 일성을 대신한다. 다람쥐가 권총 자살을 한 것 같은 풍자 섞인 장면이다. '죽은 동물'로 시커멓게 썩은 미술계를 조롱하는 작가의 결의가 엿보인다. '자, 이제부터 미술계 뒷면을 낱낱이 보여주겠어!'

땀은 배신하지 않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작품뿐만 아니라 성격, 언행, 평판까지도 작가의 위상을 만들어내는 현대 미술의 뒷마당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도쿄 작업실에서 만난 구사마 야요이는 물방울무늬가 가득한 휠체어에 타고 작업실 여기저기를 보여주다 조수에게 뭔가를 지시한다. '일급비밀'이라며 출시 전까지 오프 더 레코드 할 것을 약속받은 뒤 조수가 양손에 가져온 건 그가 협업한 루이뷔통 핸드백이었다. 그는 루이뷔통 가방을 다 꺼내 저자와 함께 간 화상에게 한 아름 안겨줬다.

제프 쿤스(왼쪽 사진)는 예술가에겐 금기복과 같은 정장을 입고 비즈니스맨처럼 늘 등장하고, 아이 웨이웨이는 항상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다. 오른쪽은 1995년 도자기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는 아이 웨이웨이.

데이미언 허스트는 농가에 있는 작업실 식당에조차 자신의 역할 모델을 보여주기 위해 앤디 워홀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가 작품을 의도적으로 걸어뒀다. 술을 끊었다는 허스트는 저자를 만나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돌아가는 길 저자에게 와인 한 병을 들려 보냈다. '미디어를 겨냥한 철저한 퍼포먼스'였다.

책은 크게 세 막으로 구성된다. 1막 '정치'에는 미술가의 권력에 대한 태도를, 2막 '친족'에선 동료와의 경쟁과 협업을, 3막 '숙련 작업'에선 작품 기획부터 마케팅까지 작품 제작의 전반을 다룬다. 연극 무대처럼 변화무쌍하게 벌어지는 예술의 장을 보여준다는 의도지만 막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대신 '미술가가 매일 리허설하는 개인 무대'인 작업실 풍경이 더 많은 얘기를 해준다.

뉴욕 첼시에 있는 제프 쿤스의 작업실은 조용한 산업 현장 같다. '자신의 손끝'처럼 직원 120여명이 일사불란하게 일한다. 회화 한 점당 조수 세 명이 16~18개월 동안 매달린다. 침실 벽엔 리히텐슈타인, 마네, 피카소, 달리 작품을 붙여 놓고 자신이 그들과 동급이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표를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정치인처럼 민감한 질문에는 즉답을 피한다. 통조림처럼 가공된 이미지다.

중국 정부에 대한 거침 없는 발언으로 서방 세계에선 '반체제 작가'로 명성 높은 아이 웨이웨이의 베이징 작업실도 수차례 간다. 감시 카메라와 도청 장치가 도사리고 있는 작업실에서 수감 생활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작가를 향해 저자는 "미술계에서는 정치인, 정치적 맥락에서는 미술가"라는 민감한 평가를 잊지 않는다.

"미술가들을 속옷만 입혀 놓은 책"이라는 멕시코 작가 가브리엘 오로스코 말처럼 통쾌한 책이다. 몇몇 작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것 같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자신의 개인전에 온 제프 쿤스와 한참 얘기하다가 저자에게 와서 묻는다. "저 미술가 이름이 뭐였죠?" '제프 쿤스와의 비교를 즐기며 한가할 땐 그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던 그였다. 안면인식장애가 아닌 한에야 이처럼 심한 언행 불일치가 또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