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블루모스크.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순수 박물관’은 한 여자와 만나 사랑한 후 남겨진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여자를 떠나보낸 뒤 평생 이스탄불의 집에 여자와 관련된 물건을 모으고 전시한다.

얼마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느 미술관이 개최하는 '실연에 관한 박물관'전에 작가로 참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전시가 파리와 런던. 타이베이 등 35개 도시를 거쳐 한국에 온다는 얘기를 하던 큐레이터는 내가 쓴 소설들이 이번 전시의 주제와 잘 부합하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꼭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그렇게 규정하길 원한 적은 없지만, 어느새 나는 정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이혼, 실연, 해고, 파산, 암 선고 같은 단어들로 명명될 뿐 그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단번에 영혼이 쪼그라들어 그림자까지 말라버린 사람들이었다.

영혼의 빛이 꺼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한낮의 태양이 두려워진 사람들은 성냥개비처럼 바짝 마른 스스로의 몸을 태워 자신을 밝힐 수밖에 없다. 남겨진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대개 그것은 일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떠나간 사람에게 쓴 편지이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떠나간 사람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의 기록이다. 오르한 파무크의 '순수 박물관' 역시 마찬가지다.

1975년 터키 이스탄불. 부족할 것 없이 살아온 케말은 약혼자 시벨의 선물을 사러 상점에 갔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일하는 먼 친척의 딸인 퓌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스탄불에 있는 케말의 집은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은밀한 아지트가 된다. 케말은 불온하게도 가정과 연인 모두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미성숙한 그는 그때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을 평생 감당해내는 일이라는 걸.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약혼식에 하객으로 찾아온 퓌순을 보고도 그토록 반가운 얼굴로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소설은 단 44일 동안의 사랑이 어떻게 한 남자의 나머지 삶을 뒤흔들었는지 보여준다. 약혼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깨진다. 그는 이제 지구 주위를 맴도는 달처럼 퓌순의 주위를 공전하며 자신의 삶을 탕진한다. 이후 삶에서 그는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너지는 고통을 참기 위해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여자 퓌순과 관련된 물건들을 모으는 것. 그는 퓌순을 만나기 위해 드나들었던 이스탄불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평생을 모아온 물건들을 전시한다. 그 박물관의 이름은 '순수 박물관'. 44일간의 사랑으로 인생 전체가 거대한 공허로 뒤바뀐 한 남자의 내면은 그렇게 전시된다.

최근에 나는 사람들과 '순수 박물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발표한 내 소설의 첫 번째 페이지에 등장하는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스탄불에 실제 이 박물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여러 번 이스탄불에 가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아직 가지 못했는데, 말할 것도 없이 내 첫 번째 목적지는 '순수 박물관'이 될 거였다. 나는 퓌순이 피우다가 만 담배꽁초 따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상실에 대한 소설을 반복해서 쓰면서 나는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강렬한 사랑이 어떻게 삶을 붕괴시키고 역설적으로 확장시키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순수 박물관'의 작가였다면 나는 그 박물관의 가장 구석에 사랑하는 남자가 집 안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며 만들었던 대낮의 그림자까지 수집해 걸어놓았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쓴 소설 속 주인공은 온갖 사물들의 그림자를 찍는 남자다. 그는 핼러윈 때문에 사람들로 가득한 뉴욕 지하철에서 '순수 박물관'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 장면을 여자 주인공이 엿보게 되는데, 그녀는 남자를 보며 이렇게 질문한다. 대체 소설의 어떤 부분이 그를 울렸을까. 소설 속에는 쓰지 않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읽고 있었을 문장을 이렇게 상상했다.

"나도 너를 사랑해. 진심을 다해 말했음에도, 나의 말은 그녀의 말만큼 강하고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먼저 말했던 것이다. 퓌순 다음으로 말했기 때문에 나의 진정한 사랑의 말에는 어떤 위로나 점잖음 그리고 모방의 어조가 배어 있었다. 게다가 그 순간 내가 정말로 그녀를,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녀의 사랑이 넘어 들어간 끔찍한 차원을 퓌순이 먼저 고백했기 때문에, 그녀가 게임에서 진 것이다."

'순수 박물관'에서 케말은 자신이 퓌순에게 이겼다고 선언한다. 사랑을 게임이라고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것에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퓌순이 먼저 사랑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과 달리 케말은 그녀에게 졌다. 사랑에 있어 누가 승자이고 패자일까. 먼저 고백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게임이 사랑일까. 나는 이제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의 고백은 결국 남겨진 사람들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읽는 그토록 아름다운 소설과 영화와 사진과 그림은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진 가장 정확한 상실의 풍경인 것이다.

나는 '순수 박물관'을 뉴욕 브루클린의 3층집에서 읽었다. 그 집은 빛과 그림자가 극명했는데, 나는 가장 밝은 부엌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친구의 책이었기 때문에 나는 평소처럼 밑줄을 긋거나 책 귀퉁이를 접지 못했다. 그것이 꽤 불편해 몇 번이나 책을 읽다 멈추길 반복했다. 어떤 기억은 사소하지만 오랫동안 영혼에 새겨진다. 파무크의 책을 읽던 그날 오후가 그랬다.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들고 있던 책 위에 햇볕이 쏟아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블라인드를 내리자 몇 개의 사선으로 쪼개진 그림자가 책 위에 밑줄처럼 그어졌다. 그 모양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울었다.

"인생이 마치 소설처럼 이제 마지막 형태를 갖추었다고 느끼는 시기에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느끼고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했던 많은 순간들 중에서 왜 이 순간을 선택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물론 우리 이야기를 소설처럼 다시 한 번 설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을 생각했을 때, 그것이 이미 아주 오래전 일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그때 내가 흘린 눈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노스탤지어 때문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자각 때문에 나는 미리 슬펐던 것이다. 제자리인 것 같지만 별의 좌표조차 끊임없이 바뀐다. 그때, 나는 내가 이토록 아름다운 시간 속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란 걸 알았다.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는 걸.

순수 박물관—오르한 파무크의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