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필리버스터(filibuster)라는 말은 해적 또는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filibustero (16-18 세기 카리브해의 해적)에서 유래한 말이다. 1854년 미국 상원에서 캔자스, 네브래스카 주를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을 막기 위해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 정치적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지금까지 세계 최장 연설 기록은 1957년 미국 상원 스트롬 서먼드 의원이 24시간 8분간 발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시간 연설이 주로 쓰이지만 규칙발언 연발, 신상발언 남발, 형식적 절차의 철저한 이행, 동의안과 수정안의 연속적인 제의, 출석거부, 총퇴장 등의 방법도 있다. 미국에서는 의제와 관계없는 내용을 말해도 상관없어 때로 성경을 읽거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낭독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의사진행을 방해하기 위한 '시간끌기 작전'이라고 볼 수 있다. 필리버스터는 소수의 목소리를 보호한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의회정치의 또 다른 기본 원칙 중 하나인 '다수결'을 방해한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우리나라 필리버스터

1964년 4월 21일 조선일보 1면.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야당의 얘기가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필리버스터를 가장 처음한 것은 1964년 당시 초선이었던 김대중 의원이다. 당시 야당 소속의 김준연 의원은 여당이었던 공화당이 한·일협정 협상과정에서 1억3000만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을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당의장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도 추가해 고발했다. 이에 야당은 정치적 탄압이라며 거세게 저항했으나 공화당 소속 국회의장은 회기 마지막 날인 1964년 4월 21일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전격 상정했다. 이때 당시 야당 초선 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회기 종료시간(오후 6시)까지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발언을 해 결국 동의안 처리를 무산시켰다. 김대중 의원의 발언은 30쪽 짜리 당시 국회 속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한 발언이 아니라 왜 체포동의안을 처리하면 안되는지에 대한 주장과 근거를 성실하게 밝히고 있다. 어떤 꼼수를 쓰지않고 주제 내에서만 원고없이 5시간을 연설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1969년 8월 30일 조선일보 1면. 3선 개헌을 두고 여·야의 대립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2016년 2월 24일, 은수미 의원의 필리버스터가 있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었던 필리버스터는 1969년 8월 29일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 개헌을 막기 위해 발언한 것이다.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는 공화당의 방침에 따라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으나 야당인 신민당 측의 지연전술 작전으로 새벽 5시간이 넘어가도록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당시 신민당의 박한상 의원은 10시간 15분 동안 밤을 새가며 발언을 해 최장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국회 본회의에서 발언한 것이 아니라 상임위 중 하나인 법사위에서 발언한 것이고, 개헌안 저지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서 나온 김대중 의원의 필리터스터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73년, 국회는 국회의 기본원칙인 '다수결'의 원칙을 무시하고, 의사진행을 지연시켜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필리버스터 즉, 무제한 토론의 발언 시간을 규정하는 국회법 조항 신설했다. 필리버스터를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2012년 국회 선진화법이 발효되기 전까지 국회 본회의에서는 15분 이상 의사진행 발언을 할 수 없도록 시간제한을 규정해왔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과 함께 부활한 '필리버스터'

필리버스터는 2012년 4월 17일 여·야 국회가 통과시킨 국회 선진화법 (당시 : 몸싸움 방지법)의 일환으로 다시 부활했다. 다시 도입된 필리버스터는 1인당 1회씩 토론이 가능하고, 재적 3분의 1의 찬성이 있으면 장시간 발언으로 의사를 진행시킬 수 있다. 스스로 발언을 멈추거나 재적의원 5분의 3이상이 중단에 찬성하면 발언을 멈춰야 한다. 국회 선진화법 입법화에 합의하고 각론을 논의하는 가운데서도 발언을 끝내는 기준에 대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입장 차이가 컸다. 민주당은 미국보다 엄격한 기준인 3분의 2 수준을 주장했고, 한나라당은 5분의 3을 얘기했다. 미국의 필리버스터 역시 5분의 3이 동의해야 발언을 중단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찬반을 두고 말이 많았던 필리버스터는 여당이었던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정몽준 의원과 남경필 의원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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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7년만에 재등장한 '필리버스터'

더민주의 필리버스터는 이종걸 원내대표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 직권 상정 방침을 접한 뒤 원내 지도부 회의에서 "필리버스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더민주는 의원총회를 하며 필리버스터 순번을 정하고 관련 전략을 논의했다.

김광진 의원 '5시간 32분'

47년 만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는 2월 23일 오후 7시 6분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부터 시작됐다. 김 의원은 "언제나 합리적이란 평가를 받아오던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직권 상정으로 본회의에 부의했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일방통행과 불통이 급기야 입법부 수장에게까지 전달된 것 같다"고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되자 새누리당 의원 대부분이 빠져나갔고, 본회의장에는 더민주 의원 30여 명만이 남았다.

김 의원 발언의 상당 부분은 준비해온 법안·지침 등을 읽는 데 할애됐다.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해 본회의에 직권 상정된 테러방지법도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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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미 의원 '10시간 18분'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2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10시간 18분에 걸쳐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을 진행해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장(最長) 필리버스터 기록을 갈아치웠다. 은 의원은 이날 새벽 2시 30분부터 낮 12시 48분까지 국회 본회의에서 연속 발언했다.

앞서 국회 본회의에서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은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1964년 4월 20일 동료인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5시간19분 동안 발언한 것이었다.

DJ의 기록은 이번에 야당 의원들의 릴레이 필리버스터 과정에서 두 번 연속으로 깨졌다.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23일 오후 7시 6분부터 24일 오전 2시 39분까지 5시간 33분 간 발언을 하면서 한 번 깨졌고, 이어 같은 당 은수미 의원의 10시간 18분 발언으로 다시 한 번 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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