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의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지."

지난 18일 89세로 별세한 미국 작가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에 실린 문장이다. 백인 작가의 시선으로 흑인에게 가해지는 인종차별을 비판한 대표적인 글로 꼽혀왔다. 원제의 Mockingbird는 앵무새(parrot)가 아니라 '흉내쟁이지빠귀'지만, 국내엔 처음부터 앵무새로 소개돼 제목이 굳어버렸다.

하퍼 리가 1960년 발표한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대공황 직후 미국 앨라배마 주를 무대로 삼았다. 여섯 살 소녀 스카우트가 아홉 살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성장소설이다. 그 소녀의 아버지인 변호사 애티커스가 억울한 흑인을 법정에서 변호하는 과정을 통해 인종차별을 비판한 사회소설이기도 하다. 미국에선 출간 2년 만에 500만부 넘게 팔렸고, 청소년 필독서로 꼽힌 가운데 40개 언어로 번역된 덕분에 세계적으로 4000만부 넘게 찍었다. 한국에선 오랫동안 '해적판'이 나돌았다가 2002년 정식 계약을 맺어 출간된 이후에만 30만부 넘게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앵무새 죽이기'는 하퍼 리의 '반(半)자전소설'로 불린다. 그녀가 앨라배마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변호사이자 주의원을 지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첫 소설이 거둔 성공의 부담감 때문에 후속작을 쓰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 이후엔 언론 접촉도 사절한 채 고향에서 사실상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2007년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을 때 모처럼 언론 앞에 나타났다.

하퍼 리의 존재는 지난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편 '파수꾼'을 55년 만에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신작이 아니라, '앵무새 죽이기'의 초고였다. 작가가 초고를 크게 고쳐 '앵무새 죽이기'를 냈기에 내용이 많이 달랐다. 작가가 금고에 보관해둔 뒤 잊고 있던 원고를 변호사와 가족이 찾아냈다.

'앵무새 죽이기'의 20년 후를 배경으로 한 '파수꾼'은 등장인물은 동일하지만, 아버지의 성격이 뚜렷하게 달라 논란이 됐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흑인 인권을 옹호한 애티커스가 '파수꾼'에선 흑인을 깔보는 백인 우월론자로 나왔기 때문이다. 애티커스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억울한 흑인을 변호했을 뿐이지, 결코 인종차별 철폐론자가 아니었던 것. '파수꾼'은 그런 아버지의 실상을 알고 실망한 딸의 심정을 상세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인종차별에 비판적인 작가의 시선이 살아있기에 '앵무새 죽이기'와 짝을 이룬 소설로 꼽힌다. 결국 하퍼 리는 소설 두 편으로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