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가 업무 스트레스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업무중 사망했다면 업무상 재해일까?

산업재해보상보험법 5조 1호에서 말하는 ‘업무상 재해’는 업무수행 중 업무 때문에 발생한 근로자의 부상, 질병, 신체장애, 사망을 뜻한다. 법원은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할 때 업무와 재해발생 사이에 인과관계를 따진다. 대법원은 “인과관계가 반드시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규범적 관점에서 따져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조선DB

◆ 업무와 사망의 인과관계가 핵심

최근 대법원은 하급심을 파기하면서 근로자나 공무원의 업무상 재해 인정 폭을 넓혀가는 추세다. 합병 후 대규모 퇴사 상황에서 성과를 재촉 받은 연구원, 해외 파견이 결정된 후 영어로 스트레스를 받은 회사원이 자살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모두 업무상 재해로 판단했다.

1·2심 법원들은 “자살은 개인의 선택인 만큼, 스트레스가 사회 평균인의 관점에서 견딜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면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2008년 대법원 판례를 들어 업무상 재해 폭을 좁게 봤다.

핵심은 업무와 사망 간의 인과관계다. 대법원 관계자는 “업무 스트레스로 정상적인 인식 능력이 저하돼 자살하게 됐다고 판단되면 업무와 사망 간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 교사 A씨는 2012년 9월 학교 화장실에서 자살했다. 사건 당시 A씨가 담당한 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회 운영이 논란이 되면서 학부모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2학년 학생들이 신입생을 폭행하고 돈을 빼앗은 사건으로 가해학생이 강제 전학가기도 했다. A씨는 주변에 업무부담과 자괴감을 호소했다.

유족들은 “업무상 재해”라며 유족보상금을 신청했지만, 1·2심(서울행정법원 행정 13부 재판장 반정우·서울고법 행정8부 재판장 장석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회 평균인’ 입장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우울증 때문으로 인정하기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올 1월 28일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A씨는 가해·피해학생, 학부모들로부터 원망과 질책을 받아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스승으로서 학생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정신적 자괴감에 빠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경북 경주 콘도에서 14년 일해온 41세 B씨는 2010년 8월 콘도 객실에서 자살했다. 회사가 경영난으로 다른 기업에 넘어간 후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팀장에게 일을 독촉받거나 사무실에 책상도 없이 리조트 내 전기실·기계실·프런트·주방을 옮겨 다니며 잡무를 했다. 새로운 상사와 잦은 마찰로 우울증 증세도 보였다. 그러던 중 객실 손님에게 심한 욕설을 듣고 자살했다.

1·2심(대구지법 행정단독 김성열 판사·대구지법 행정부 재판장 이기광)은 “자살할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는 아니었다. 업무상 재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산업 재해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자살 동기가 될만한 특별한 사유가 나타나지 않았다. 업무 스트레스가 누적돼 수면장애, 불안, 활력 감소 증상을 보였다. 모욕적인 말을 듣고서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 업무 중 숨졌어도 업무와 사망 간 인과관계 부족하면 인정 안돼

업무 중 숨졌어도 업무와 사망 간의 인과관계가 부족하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말 뇌출혈로 쓰러져 숨진 20대 회사원 C씨에 대해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과로·스트레스와 사망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건축설계 일을 하던 C씨는 2012년 6월과 7월에는 각각 3일·2일만 쉬고 나머지 날에 모두 출근했다. 8월부터 9월 쓰러지기 전까지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출근했다. 선배의 업무를 대신하고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다. C씨는 2012년 9월 6일 출근 직후 두통과 현기증을 느껴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병원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C씨는 5일 뒤인 11일 뇌실내출혈과 박리성 뇌동맥류로 숨졌다.

대법원은 “4주 전부터 휴무 없이 근무하기는 했으나, 보통 오후 8시 이전에는 퇴근해 어느 정도 규칙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뇌동맥류는 특별한 원인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파열될 수도 있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있었더라도 이로 인해 뇌동맥류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 늘어나는 산재신청...“업무상 재해 인정 사례 많아질 것”

자살은 최근 주요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아 공개한 ‘정신질환 산재 신청 및 판정 건수’ 자료를 보면, 각종 정신질환을 이유로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는 2010년 89명에서 2014년 137명으로 늘었다. 산재를 인정하는 비율도 23.6%(21명)에서 34.3%(47명)로 증가했다.

박기억(54·사법연수원 28기) 박기억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과거에는 업무 스트레스가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며 시각이 바뀌고 있다. 최근 대법원 판례는 이런 시각 변화의 신호탄이다”고 했다.

박영규(50·군법무관임용시험 10회) 청맥 변호사는 “과거에는 업무상 재해 청구 소송에 대해 자살을 본인 선택으로 보는 판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근로자의 자살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범위가 확대됐다. 앞으로도 근로자의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사례가 많아질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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