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사회정책부 차장

'역사상 가장 영화 같은 자살 사건'이 지난달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재생됐다. 1974년 7월 15일 아침 플로리다주(州) 서부 도시 새러소타의 WXLT-TV 소속 여성 앵커가 생방송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실화를 소재로 한 두 작품이 이 독립영화제에서 개봉됐다. 뉴스 토크 쇼를 진행하던 크리스틴 처벅은 "시청자 여러분, 이제 자살 시도 장면을 보시겠습니다"면서 준비해둔 38구경 권총을 오른쪽 관자놀이에 갖다 댔고, 그녀의 충격적 최후는 선연한 컬러 영상으로 전달됐다.

모든 자살엔 전조(前兆)와 경보(警報)가 있다. 처벅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벅은 사건 여드레 전 권총을 구입했는데, 연유를 묻는 방송사 동료에게 "나를 날려버리는 기막힌 일이 생중계되도록 궁리 중"이라고 예고했다. 망자의 어머니는 "딸이 오랜 기간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비극의 징후는 뚜렷했지만 "흉측한 농담이라 화제를 돌렸다"(동료), "딸이 해고당할까 봐 자살 성향을 직장에 알릴 수 없었다"(어머니)는 주변의 망설임 탓에 앵커우먼은 서른 살 생일을 맞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장례식엔 "영원한 소외를 택한 그녀 앞에 우리 모두 죄책감을 느낀다"는 조사가 낭독됐다.

42년 전 참변을 지면에 소환한 건 이 사건이 자살 사건의 공통점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사적 발신자(자살자)와 불감증 수신자(가족·동료) 간 불통은 지난달 26일 발표된 국내 첫 심리 부검(psychological autopsy) 결과에서도 재확인됐다. 자살자 121명을 추적 연구했더니 93%가 경고 신호를 보냈는데 유가족의 81%가 그걸 해독하지 못했다. 소중한 생명이 세상과 결별을 택한 책임의 일부가 우리(사회)에 있음을 상기시킨 것도 그렇다.

한 해 1만5000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자살 공화국'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정신병자로 소문날 바엔 죽음을 택하겠다'는 극단적 낙인(烙印) 기피증이다. 국내 자살자 121명 중 88%가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었지만, 이 중 15%만 정기적인 약물치료를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인데 항우울제 사용은 OECD 최하위권이란 통계는 같은 맥락"이라면서 '우울증 미치료'를 한국형 자살의 주요 유형으로 제시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유족에게 남아 심리 부검에 대한 강한 반감과 저항으로 나타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충동적 자살' 빈도가 높다는 것,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막을 수 있는 확률도 높다는 것이 관계자들이 진단하는 한국형 자살의 특징이다.

정부는 자살 예방책을 포함한 제4차 국민건강 증진 종합 계획을 이달 중 발표한다. 관(官) 정책에 앞서 자살 예방을 사회 공동 책임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주문한다. "자살자의 죽을 의지를 규명하다 보면 그 의지가 '살려 달라'는 내면의 호소임을 깨닫게 된다"는 서종한 심리 부검 전문가의 경험칙을 경청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