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족(漢族) 여성에게 점심 대접받았어요. 명절에 고향 가기 전에 들렀다고. 막노동하며 억척같이 모으는 사정을 알기 때문에 싼 거 먹자는데도 1만5000원짜리 한정식 사주더군요. 8년 전에 임신 7개월인 채로 한국인 남편에게 쫓겨나 교회를 찾아와 인연을 맺은 친구죠. 저를 '빠바 무스'(아빠 목사)라고 부르지요."

중국 동포, 중국인(한족)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이야기를 적은‘황하의 물결’을 펴낸 최황규 목사. 그는“하도‘미친놈’소리를 많이 들어서‘미친놈 아닙니다’란 마음으로 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대림동 서울중국인교회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는 최황규(53) 목사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최 목사는 2003년 중국인교회를 개척해 한족을 대상으로 목회하며 이들의 아빠, 삼촌, 형, 오빠 역할을 해왔다. 서울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욕먹는 게 일'이다. 중국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불합리한 관행과 공무원들에 맞서다가 "나라 망신" "미친 짓" "고상한 척한다" 소리 숱하게 들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중국 유학생들이 난동을 피웠을 때, 핵과 미사일로 도발하는 북한을 중국이 두둔할 때면 성난 시민들이 교회 문을 걷어차고 들이닥치기도 한다. 그는 최근 자신의 목회 인생을 정리한 책 '황하의 물결'(홍성사)을 펴냈다.

최 목사는 당초 '투쟁'과는 거리가 먼 모범생이었다. 집안은 너무도 가난했다. 중학교 진학도 어려워 교회가 운영하는 비인가 학교를 나와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다. 대학 진학 때까지 성경을 26번 완독(完讀)해 면접 교수를 놀라게 할 정도로 공부와 성경밖에 몰랐다. 학부는 장학생으로 다녔고 신대원과 대학원은 수석(首席)으로 입학했다. 누가 봐도 '미래의 교수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목사 안수까지 받고도 교계를 떠났다.

"제가 성경으로 치면 '바리새파(派)'같은 기질이 있어요. 원리주의자이죠. 도저히 저 스스로 목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데 어떻게 설교를 하겠어요. 그래서 신학 서적 번역하면서 지냈죠."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마련한 길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1999년 우연히 만난 중국의 반체제 인사 쉬버(徐波)의 난민 지위 인정을 돕기 위해 나서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당시 사회문제화되던 중국 동포를 돕기 위해 조선족 교회 부목사로 합류하게 됐고, 2003년엔 중국인교회를 따로 설립했다.

"제가 중국인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니 조선족 동포들이 '되놈들을 왜 돕냐?'고 말렸어요. 그게 현재 우리나라에 와 있는 한족들의 처지입니다. 중국 동포들은 중국에서 한족들에게 당한 설움 때문에 '너희도 한번 당해봐라' 하는 마음이 있고, 한국인들도 무시하고요."

그 역시 중국 동포와 한족을 대하는 마음은 복잡하다. 중국의 고압적 태도에 눈치 보는 한국 정부에 대해선 누구보다 화가 난다. 그러다가도 이국(異國)에서 온갖 고통 당하는 한족을 눈앞에서 보면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며 또 욕먹을 일에 나선다. 그는 지금도 2010년 현재의 건물로 이사 올 때를 회상하면 얼굴이 상기된다. 가리봉동 지하층 세들었던 건물이 철거될 처지가 되자 한족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6000만원을 헌금했던 것. "중국인들이 돈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아시잖아요? 중국을 좀 아는 분들은 이 이야기 들으면 다들 놀랍니다." 교인들은 2014년부터는 매월 1000원씩 남북통일을 위한 헌금도 하고, 지난해에는 통일 나눔 펀드에도 동참했다.

최 목사는 "우리 교인 같은 중국인들은 중국 복음화와 민주화 그리고 남북통일의 불씨가 될 귀한 사람들"이라며 "힘든 일 많고, '무섭지 않냐?'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렇지만 인도주의가 없는 세상은 지옥 아닙니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