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알퍼·칼럼니스트

내가 가본 지구상 그 어떤 나라보다 한국에서 사랑받는 물건이 있다. 바로 플라스틱 재질 슬리퍼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정확히 6명의 직원이 그런 슬리퍼를 신고 있다. 사실상 나를 제외한 모든 직원이 신고 있다. 한국 어느 회사에서 일하든 아마 반경 500m 안에서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격식 있는 옷차림을 강조하는 한국이지만, 플라스틱 슬리퍼는 예외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아이들도 슬리퍼를 신고 다니고, 말끔한 와이셔츠를 입은 회사원도 회사에서 슬리퍼를 끌고 다니며, 곱게 화장한 커리어우먼도 슬리퍼를 신고 일한다.

한국의 슬리퍼 문화를 비웃는 건 전혀 아니다. 그저 낯선 문화라고 생각할 뿐이다. 영국이나 다른 외국에서 살 때 플라스틱 슬리퍼는 대개 해변에 놀러 갈 때나 신는 물건이었다. 해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슬리퍼를 신는 사람은 '패션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다.

처음엔 나도 말쑥한 양복 차림의 회사원이 일하러 오자마자 낡고 볼품없는 슬리퍼로 갈아 신는 모습이 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10년쯤 여기서 살다 보니 '그러면 안 될 건 또 뭔가'라는 생각이 든다. 일할 때 꼭 불편한 하이힐 같은 걸 신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처럼 덥고 습한 나라에선 여름철에 하루종일 신발을 신고 일하는 건 고역이다. 가죽 재질로 된 신발은 사실 발을 가두는 일종의 감옥이다. 슬리퍼는 잠깐이나마 그 감옥에서 탈옥시켜주는 고마운 존재 아닐까. 나 역시 이제 두 켤레의 슬리퍼를 구비해두고 있다. 그중 싼 것은 화장실 갈 때 신고, 비싼 건 일할 때 가끔 신는다.

슬리퍼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하나 더. 당신이 신입사원이라면 아마 슬리퍼를 신더라도 본인의 책상에 앉아 일할 때만 조심스럽게 신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하루종일 자유롭게 슬리퍼를 착용한 채 사무실을 활보할 수 있다면? 추측건대 당신은 최소한 부장 이상 직급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