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 발생 후 3년여 만에 취임했다. 실업자들은 거리로 흘러넘쳤다. 전임 후버 대통령의 무능은 누구도 변호할 수 없었다. 거덜난 나라를 물려받은 루스벨트는 취임식에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시선을 모은 뒤 몇 분 동안 전임자의 실패를 비판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취임사 첫마디는 "존경하는 후버 대통령"이었다. 그는 후버의 공화당 정권을 조금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미국은 감사해야 할 것이 많다"고 감싸고 나왔다. 같은 해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올랐다. 히틀러나 루스벨트나 처참한 경제를 유산으로 받았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재정 지출을 늘려 인프라를 건설했고 중화학공업을 일으켰다. 둘은 그렇게 장기 집권하며 국민을 대공황 수렁에서 구해낸 영웅이 됐다.

하지만 앞선 정권을 대하는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다. 히틀러는 취임사에서 이전 정권의 부패와 타락을 집중 공격했다. 히틀러는 연설 때마다 전임자들을 비난해 박수를 받았다. 그가 유대인을 처형하고 반대파를 숙청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루스벨트는 인디언과 흑인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히틀러처럼 거대한 스타디움에서 군중을 선동하기보다는 벽난로 옆 라디오 연설로 국민과 조곤조곤 대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두 지도자가 12년 뒤 자기 나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미국 대통령들을 연구한 김봉중 교수(전남대)의 책을 읽다가 문득 우리 대통령들의 취임사가 궁금해졌다. 역시 취임사에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었다. 열두 대통령마다 자신이 '새 시대' '새 국가' '새 역사'를 열었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삼천만 남녀가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로' 했다고 했고, 윤보선 대통령은 자신을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라고 했다. 대한민국과는 다른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말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 성조(聖祖)가 천혜(天惠)의 이 강토 위에 국기(國基)를 닦으신 지 반만년"을 들고 나오더니 "연면히 이어온 역사와 전통 위에… 우람한 새 공화국의 아침이 밝았다"고 했다. 5000년 만의 새 공화국 출범이라는 뜻인가. '임시 관리 정부'를 자칭했던 최규하 대통령에 이어 등단한 전두환 대통령 역시 '구(舊)헌법, 구(舊)정부 등의 구시대적 논리로부터 결별한' 새 공화국 출범을 비장한 어투로 선포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시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도 바로 앞 정권과 차별화하려는 표현이었다.

전임자의 업적을 칭송한 사례가 딱 하나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정권을 물려준 친구에게 존칭어까지 써가며 '평화적 정부 이양의 역사적 선례를 세우신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반대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 식민지 외교(윤보선)"라며 직설적으로 비난하거나 "(IMF 외환 위기에 대해)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마땅히 밝혀져야 한다(김대중)"고 원망한 사례가 적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면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 청산을 선언하기도 했다.

윤보선·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건국 업적을,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 업적을 평가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때는 '차떼기 헌금'으로 통하던 정치권과 재계 간의 불법 정치자금 관행이 정리됐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 화해, 외환 위기 극복을 말하면서도 전임자 이름 석 자 한번 불러주지 않았다. 미국의 대통령들처럼 취임 연설 때 링컨, 루스벨트, 조지 워싱턴 등 전임자들을 칭송하는 풍경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우리 대통령들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면 기나긴 역사에서 자신은 짧은 단막극의 임시 배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는 듯하다. 그래서 새 공화국의 주인공으로서 새 역사를 쓰게 됐다는 착각 에 빠져 앞선 정권들을 지우고 청소하는 일에만 열중하는가 보다. 노무현 정권 때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북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오갔던 자금 거래를 수사했고,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 대통령을 부패 혐의로 수사하다 결국 자살로 몰고 갔다.

박근혜 정권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자원 외교 비리를 수사하는가 하면 포스코와 농협을 몇 달씩 샅샅이 뒤졌다. 4대강 사업에도 칼을 휘두르더니 가뭄이 닥치자 슬그머니 물러섰다. 이번엔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해지자 청와대가 자기들 공을 강조하기 위해 "역대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고 꼬집고 나왔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해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내뱉은 꼴이다. 우리 대통령들은 언제까지 전임자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