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회 조선비즈 대표

올 경제 산업계는 '조선·중공업·엔지니어링 등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의 몰락' '이노베이션(innovation)을 바탕으로 한 신수종 산업의 지지부진'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산업의 버티기' '유통·면세점·건설 부동산업의 약진'으로 요약된다. 재벌 대기업들이 진출한 분야인데, 판세를 보면, 현금 창출 내수 업종에 집중한 반면 미래를 위한 도전형 업종은 애써 피했다는 분석이다.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 3사의 7조원대 적자, 삼성엔지니어링의 조 단위 적자에서 보듯 조선, 중공업 대기업들은 살아남는 게 유일한 목표일 정도로 다급하다. 수조원의 추가 부실이 또 터질 것이라는 얘기이고 보면 내년도 암울하다. 재벌 대기업 스스로 시장을 안이하게 보다가, 국민에게 엄청난 부담만 안기고 있다는 비난이 1년 내내 제기됐다.

올해 재벌 대기업들을 지탱해 준건 글로벌 아닌 내수시장이었다. '무역 1조달러 시대를 열기나 했을까' 싶을 정도로 수출은 급감했다. 대신 면세점, 유통업이 호황이었는데, 돈 벌었을 때 투자하지 않다가 어려워지니 현금 장사로 쏠리는 얄팍한 행태가 씁쓸하다.

두산인프라코어 등 중후장대 기업군(群)인 두산그룹은 중국인 관광객, 고소득 내국인 호주머니 터는 면세점 특허 취득에 집착했다. 그룹 주력이던 맥주 사업까지 접고, 중후장대 기업 인수를 통해 국가산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던 기업가 도전정신을 포기했다는 비난마저 사고 있다. 화약, 화학그룹인 한화그룹도 그룹 상징인 63빌딩을 면세점 터로 내놓았고, 재계 1위 삼성그룹의 신라호텔과 범(汎)현대그룹의 현대산업개발이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은 분야 역시 면세점이었다. 신세계그룹이나 롯데그룹 역시 백화점·아웃렛·면세점 확대나 수성(守成)에 집착할 정도로 내수 공략 전략을 펼쳤다. 올해 황제주(株)로 등극한 아모레퍼시픽도 중국과 아세안 등 일부를 제외하고 해외시장에서 별 실적은 못 낸 채 국내시장 확대에만 골몰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다가 중소 화장품 기업들과 소송전, 대리점들에 대한 갑(甲)질 논란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건설 부동산 분야는 또 어떤가. 대우건설, GS건설, 대림산업 등은 중동에서의 조(兆) 단위 적자를 올해 국내 아파트 분양 사업을 통해 꽤 벌충했다. 하지만 국내 소비자들 주머니 털어 해외 적자를 메웠다는 비난도 듣는다. 국내 부동산시장이 식을 경우 언제 또다시 비우량 기업으로 전락할지 알 수 없다.

재벌 기업들이 편한 현금 장사, 안방 시장에 집중하는 배경에는 창업자들의 도전정신이 후계 승계를 거치면서 퇴색해버린 게 우선일 것이고, 3~4세 후계자들에게 안전한 돈벌이를 챙겨주겠다는 장삿속도 깔려 있을 것이다. 후계자들 역시 굳이 위험 부담을 안고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기보다 명품 수입하고, 고소득 소비자들의 현금을 끌어낼 수 있는 안방 장사에 더 매력을 느낄 것이다.

'중국은 생산 공장이 아니라 혁신 공장이다. 공학 인력 배출 수와 창의적 아이디어 등 혁신의 관점에서 한국을 이미 뛰어넘었다. 어떤 품목의 경우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서울공대 이정동 교수, '축적의 시간'). 재벌 대기업들이 혁신 없이 현실 안주에 빠져드는 한 한국 경제의 미래도 어둡기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