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집이 없어서 보육원에서 살고 있어요." 아버지와 그의 동거녀 등에게 2년여간 집에 갇혀 학대당하다 지난 12일 스스로 탈출한 A(11)양은 이렇게 거짓을 말했다. 발견 당시 몸무게 16㎏에 과자 봉지를 뜯을 기력조차 없던 A양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집(인천 연수구)에서 도망쳤다가 행인한테 끌려 집에 돌아간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어른한테 '집이 있다'고 알려준 걸 후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A양 사건을 계기로 아동 학대에 대한 신고 의식 부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A양은 행인과 장기간 무단결석했던 학교 관계자, 이웃 등이 신고해 지옥 같은 집을 빠져나올 기회가 최소 세 번은 있었으며, 그대로 방치됐으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어른들이 신고하지 않아 학대받던 아동이 참혹한 지경에 이른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2013년 울산 계모의 의붓딸(8) 폭행 살인 사건은 3년 반 동안 학대받던 어린이가 양쪽 갈비뼈 16대가 부러져 숨졌다. 당시 진상조사위원회는 학교·학원·병원 관계자 등 신고 의무자 최소 5명 중 누군가가 신고했더라면 소녀를 살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진상 조사에 참가한 세이브더칠드런 관계자는 "전출입 업무를 처리한 지자체와 아동 보호 전문 기관 두 곳 등 국가기관이 개입해 소녀를 살릴 기회가 모두 22차례나 있었지만, 전부 놓치고 말았다"고 말했다. 자격 없는 부모의 학대로 지옥을 경험하는 아이들은 간절히 도움의 눈짓을 보내지만, 이를 외면하는 주변 어른들의 무관심과 침묵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장화정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관장은 "신고를 통해 위기의 아동을 살리고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A양 사건의 경우, 2년여 전 결석 사실을 알고 집까지 방문했던 학교 관계자, 비명·신음 등을 들었을 가능성이 큰 이웃이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 무척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동 학대 특례법에 따라 학대 의심만 가도 신고해야 하는 신고 의무자는 의사·교사 등 24직군이다.

정당한 사유 없이 신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500만원 이하 과태료가 이들에게 부과된다. A양은 신고 의무자가 아닌 수퍼마켓 주인이 아니었다면 더 큰 화를 당할 뻔했다. 수퍼마켓 주인은 네 살 수준 체중에 맨발로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소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신고했다.

울산 아동 학대 소녀 사망 사건에서도 소녀가 폭행당한 사실을 눈치 챈 교사와 학원 관계자, 머리에 난 혹을 진찰한 의사 등이 신고하지 않았다. 아동 보호 전문 기관은 현장 조사 후 학대로 판명해 놓고도 가정 복귀 조치를 내렸다.

한 지역 아동센터장은 "아이가 센터에 안 나와 집을 방문했더니, 집 안이 쓰레기장 같았고 아이는 영양실조 상태였다"면서 "일용 근로자인 아버지가 몸이 아파 아이를 방임하는 상황이라 신고보다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후원자를 연결했다"고 말했다. 한 가정 어린이집 원장은 "네 살 남아가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멍이 들어 있어 베트남인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아빠가 말을 안 듣는다고 때렸다'고 했다"면서 "그 가족과 맺은 신뢰 관계가 깨질까 봐 신고를 못 했다"고 말했다. 실제 신고 의무를 어겨 과태료 부과 조치를 받은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현실에선 '신고해 봐야 귀찮아지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한 소아과 의사는 "별것 아닌데 문제를 키울까 봐 또는 '내 자식 내가 가르친다'는 부모와 입씨름하다 지쳐 신고를 꺼리는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전문가들은 "신고 의무자를 전체 공무원으로 확대하고, 아동의 이상을 빨리 파악할 수 있는 의사·교사가 더 분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동 학대 부모를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다는 한 가정의학과 개원의(47)는 "지속적인 아동 학대임을 금세 파악할 수 있는 가늠자는 몸의 멍 자국 색깔이 다르고 부모가 추가 치료에 소극적인 것"이라면서 "학대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오는 경우는 실제로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美선 신고 안 하면 징역 5년

국내 아동 학대 가해자의 81.8%는 부모다. 집에서 은밀히 이뤄지는 탓에 한국 아동 학대 발견율(인구 1000명당 학대 아동 발견율)은 1.1로, 미국(9.1)·호주(17.6) 등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호주에선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가 집 대문을 혼자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이웃은 신고하도록 돼 있다. 아이가 집 안에 혼자 있을 경우 각종 사고가 날 일에 대비한 것으로, 부모의 자녀 방기(放棄)를 차단한다는 취지다.

미국에선 훨씬 엄격한 신고 의무와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주(州)는 사회복지사, 의료·보건 종사자, 교사, 보모, 육아 전문가 등 특정 직업군에게 아동 학대 신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48개 주에서는 신고 의무자들이 정당한 사유 없이 신고를 누락하면 징벌도 부과한다. 미 아동복지국 자료에 따르면 신고 의무를 소홀히 한 의무자에게 최장 5년 징역이나 1만달러(약 117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일부 주에서는 두 번 이상 신고를 누락하면 중범죄로 분류해 처벌을 강화한다. 7개 주에서는 아동 학대가 드러났는데 의무자가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경우, 피해에 대한 민사 책임을 묻기도 한다. 미 아동 복지 단체 세이프허라이즌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 아동 학대 신고의 60% 이상은 가족·친지가 아닌 신고 의무자들이 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홍창표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팀장은 "아동 학대는 피해 당사자가 신고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조그만 의심이라도 들면 신고하는 것이 피해 아동과 그 가정, 사회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