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1986년 새해 경제부총리에 취임한 김만제 장관은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상가(喪家)에서 조문객을 맞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들 했다. 웃는 얼굴에 복이 찾아들 것이라고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경제 부총리를 맡자마자 운좋게도 해외에서 순풍이 불어왔다. 원유 가격과 국제 금리, 달러 가격이 덩달아 떨어졌다. 조선일보는 이 기회를 '3저 호황'이라고 명명하고 "한국 경제에 전기(轉機)가 왔다"고 연일 기사를 내보냈다. 단군 이래 첫 대형 호황은 그렇게 상륙했다. 1986년 11.2%, 다음 해 12.5%, 올림픽의 해 1988년 11.9%씩 성장했다. 국제수지는 사상 처음 연속 흑자를 내며 모두 만세를 불렀다.

고도성장의 파티가 한창일 때 민주화 운동이 발발했다. 마이카 구입, 해외여행 붐이 불어닥친 사무실의 한편에선 '넥타이 부대'가 최루탄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데모를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이라 부르는 민주화 운동은 대학 캠퍼스와 도심 거리를 휩쓸었다.

온 나라가 들끓던 시기였다. 정치적 민주화 욕구, 성장 과실의 분배 요구가 동시에 폭발했다. 노조가 해마다 2000개, 3000개씩 신설됐다. 산업화의 열매는 민주화를 통해 국민에게 배분됐다. 국민소득 가운데 임금 근로자들에게 할당되는 몫이 부쩍 많아졌다. 분배가 실현되면서 중산층이 두꺼워지는 증거가 늘어났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한 세대가 물러가고 다음 세대가 나라 한가운데 들어섰다. 성장률은 2%대로 찌그러졌다. 엊그제 한국은행은 내년 인플레 목표를 2%로 잡았다고 발표했다. 물가를 잡으려고 공권력을 휘두르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이제는 물가를 끌어올리겠다고 나왔다. 강물이 산으로 역류(逆流)하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고 모두들 자부심이 대단했다. 따지고 보면 허망한 자화자찬이다. 우리가 성취한 산업화란 기껏 신발·섬유 같은 경공업 몇 가지, 반도체·자동차·조선·전자 같은 중화학 산업 몇 개에 불과했다. 금융이나 인공두뇌, 서비스 업종에선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회사가 하나도 없다.

민주화 자랑도 쑥스럽기 짝이 없는 허풍이 들었다. 민주국가로 가보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고 말해야 옳았다. 민주화됐다는 국가를 지탱하는 기둥이나 벽, 창문 역할을 하는 통치기구들을 보라.

민주화 항쟁 이후 국민은 자기 대신 권력을 행사하라고 국회에 힘을 몰아주었다. 하지만 30년 후 오늘은 어떤가. 권력을 위임받은 대리인들은 스스로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오히려 권력의 원조(元祖) 위에 올라서서 갑질 횡포를 즐기는 사람들이 바로 국회의원 집단이다. 누구 좋으라고 서울 시청 앞에서 우리가 최루가스를 들이마셨는지 모를 일이다.

1970년 가을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은 "나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쳤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민노총은 도심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폭력 시위의 단골 출연 집단이 됐다. 전태일이 처음 조직한 노조는 힘도 없고 돈·조직도 형편없는 '바보회'였다. 반면 민노총은 월급 많고 복지 혜택이 두둑한 정규직 모임이다. 민주화 투쟁의 결과로 탄생한 노조들은 30년 사이 기득권 세력이 돼버렸다.

전교조를 비롯한 많은 시민 단체가 1987년 항쟁 이후 떠올랐다. 이런 민주화의 '파생 상품'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원래의 순수한 모습을 간직한 곳이 있는가. 민주화의 파생 조직들은 금융 파생 상품처럼 반드시 어느 구석에는 순진한 가입자를 속이거나 애꿎은 고객을 골탕 먹이는 독소(毒素)를 품고 있다. 환경 운동가, 소비자 운동가들은 재벌 기업 근처에서 협찬금을 챙기는 기발한 기술을 발휘하다가 대부분 타락하고 말았다.

여태껏 국민은 산업화 세력, 민주화 세력을 가리지 않고 지탱해주었다. 민족 재벌을 키웠고 총수들이 2세, 3세에게 세금 얼마 내지 않고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도 대범하게 받아들였다. 소위 민주화 인사들에 대해서는 대통령·국회의원 만들어주며 떠받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저성장의 쪼가리 배당금뿐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산업화 시대의 폐막과 함께 민주화 시대도 한계점에 도달했다. '1987년 체제'를 폐기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지 않고서는 3저 호황은커녕 더 이상의 경제성장도 바랄 수 없다. 국회를 보나 관료 조직을 보나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민주화의 적자(嫡子) 행세를 하는 노동계, 시민 단체도 엉뚱한 투쟁에 집착하고 있다.

이제 민주국가로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민주화(民主化) 국가'가 아니라 성숙한 민주국가로 바로 건너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선진국으로 갈 거냐 말 거냐 논쟁만 하며 언제까지 망설이고 있을 것인가. 먼저 선진국 제도와 관행, 선진 시민의 공공 의식을 과감히 받아들여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그걸 위해서는 국회와 행정부부터 먼저 손을 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