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대문세무서를 허물고 지은 임시건물 앞에 꽃 몇 송이가 놓여 있었다. 가을 들국화 중 하나인 구절초로 보이는 그 꽃들은 다 타버린 연탄재의 구멍에 꽂혀 있었다. 누군가 작은 골판지에 글귀를 써 그 옆에 놓았다. "뜨거울 때 꽃이 핀다." 아마도 지금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측에서 내놓았을 것이다. 연탄재와 들국화를 가져다가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 그 누군가의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그 작가는 골판지 앞에 앉아 매직펜을 들고 어떤 문장들을 생각했을까. "뜨거워야 꽃이 핀다"를 생각해봤을 것 같다. 이 문장은 그러나 "뜨겁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혀 약간 훈계조로 들린다. "뜨거운 사람만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은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 '뜨겁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말할 것도 없는 표절이다. 결국 작가는 "뜨거울 때 꽃이 핀다"를 고름으로써, 의도된 뜨거움이든 아니든 뜨거움이 꽃을 피우는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글에서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주 쓴 글의 후폭풍을 보니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연탄불은커녕 성냥불처럼 화르륵 타고 꺼져버릴 줄 알았던 글이 집 한 채를 집어삼키는 화마(火魔)가 되는 것을 보며 글쓰기의 어려움과 괴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얼마 전 이사하다가 어렸을 적 일기장들을 발견하고 속절없이 주저앉아 한참 읽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쓴 일기장 10여권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중학교 3학년때 쓴 일기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나는 기자가 되고 싶다. 내가 겪은 이야기와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를 나는 글로 잘 쓸 자신이 있다."

민족의 장래와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는 글은 나 말고도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보다 잘 쓰려면 우주의 신비나 생명의 기원에 대해 써야 하겠으나 그것은 내 깜냥 밖이다. 나는 앞으로도 내가 겪은 이야기와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를 잘 써볼 생각이다. 다만 감정 조절을 더 잘하고 아 대신 어를 쓰는 법을 더 배워야겠다. 독자 제현(諸賢)의 질책과 격려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