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높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가 1999년 뉴욕 맨해튼에서 집회를 했다. 요란한 예고와 달리 시위대는 달랑 18명이었다. KKK단 차림인 뾰족 모자에 흰옷을 입었지만 복면은 쓰지 못했다. 뉴욕 당국이 150년 된 '집회 중 복면 금지' 조항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복면을 벗어야 하니 참가자부터 크게 줄었다. 얼굴을 드러낸 단원들은 기가 죽어 구호 한번 제대로 외쳐 보지 못했다. 반대 시위대와 구경꾼에게 둘러싸여 조롱까지 당하다 예정 시간도 못 채우고 해산했다.

▶사람들은 주변이 조금만 어두워도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여긴다. 선글라스도 그런 착각을 준다. 1971년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감옥 실험'을 했다. 건강한 남성들을 모아 가상 감옥에서 반은 교도관, 반은 수감자 역할을 맡겼다. 2주를 진행하려던 실험은 6일 만에 끝났다. 교도관은 지나치게 가학적이 되고 수감자는 너무 복종적이 됐기 때문이다. 교도관에게 준 것은 제복과 선글라스였다. 선글라스는 그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9년 미국 퍼듀대 심리학팀이 핼러윈 복장을 한 아이 58명을 관찰했다. 연구팀은 아이들을 동물이나 만화 주인공으로 변장시키고 그중 절반에겐 마스크를 씌웠다. 그런 뒤 사탕을 한 번에 두 개씩만 집어 가게 했다. 얼굴을 드러낸 아이 가운데 규칙을 어기고 사탕을 두 개 넘게 가져간 비율은 37%였다. 마스크 쓴 아이는 그 비율이 62%나 됐다. 마스크를 쓰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과격·격렬 시위에선 으레 복면이 등장한다. 지난 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민중 총궐기 집회'도 그랬다. 경찰이 그날 영상과 자료를 분석해 594명이 폭력을 휘두른 증거를 확보했다. 하지만 신원을 밝혀내 소환장을 보낸 사람은 153명밖에 안 됐다. 74%, 441명이 복면이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세월호 집회나 5월 노동절 집회도 폭력과 불법을 주도한 시위대의 90%가 복면과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시위 현장에선 가뜩이나 흥분하고 격렬해지기 쉽다. 그런 곳에 복면까지 뒤집어쓰고 나오는 것은 '오늘 한번 폭력과 불법을 맘껏 휘둘러 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캐나다·독일·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복면 시위를 법으로 금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도 시위에서 복면을 쓰지 못하게 하자는 움직임이 일자 야당은 "집회·시위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때리고 부수는 폭도를 언제까지 '자유'와 '인권'이라는 단어로 감싸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