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증산동 골목길에 있는 1970년대식 이층 주택. 통화한 뒤 찾아갔지만 황은주(87) 여사가 집주인은 아니었다.

"이 집 주인의 와이프가 친척인데 방 하나를 내줘 임시로 지내고 있어요. 지난달 26일 외조부님 거사일에 맞춰 미국서 아예 들어왔어요. 막상 돌아왔지만 무일푼이고 달리 갈 데가 없어요. 내 한 몸 의탁할 수 있는 무료양로원을 좀 알아봐주십사 하고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도 부탁했어요."

그녀는 안중근 의사의 외손녀다. 안중근의 3대(代) 후손 가운데는 그녀가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작은 체구에 걸음걸이가 불편해보였다. 그녀가 임시로 쓰는 방에는 여행용 트렁크에서 꺼낸 옷과 비품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안중근 의사 외손녀인 황은주씨는“내 한 몸 의탁할 수 있는 무료양로원을 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에 사는 자식들과 떨어져 나만 혼자 한국서 살아왔어요. 그전에는 피아노 개인 교습으로 생활했어요(그녀는 이화여대 기악과 전공). 4년 전 고혈압을 앓으면서 힘들었어요. 그래서 미국의 자식에게로 갔어요. 하지만 거기서는 말이 안 통하고 대화할 친구가 없어요. 집 밖을 나가봐야 길도 몰라요. 자동차가 없으면 외출할 수도 없잖아요. 나 같은 노인에게는 철창 없는 감옥 생활이었지요. 굶어죽어도 한국에서 그래야겠다 싶어 다시 온 겁니다."

―본인을 위해 쓸 돈은 남겨두지 않았나요?

"내가 살던 경기도 용인의 27평형 아파트를 팔고는 미국으로 갔어요. 얼마 되지 않는 아파트 판 돈은 자식들에게 나눠줬어요. 자식들도 거기서 기반을 못 잡고 다들 경제적으로 어려워요."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생존 외손녀로서 연금을 받지는 않습니까?

"외손(外孫)이라 신청한 적이 없어요. 다만 아버지에 대해 지금까지 다섯 번 신청했지만 '독립운동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며 기각 통보를 받았어요. 해방과 더불어 아버지는 비명(非命)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꼭 해드리고 싶었어요. 내가 아니면 이제 해줄 사람도 없어요."

무료양로원을 찾는 그녀의 딱한 처지를 전해듣고 찾아왔다가, 나는 역사 속에 묻혀있던 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비극적 운명과 마주쳤다. 해방을 맞은 뒤 그녀의 아버지(안중근의 사위)가 중국에서 암살된 사실을. 그것도 야밤에 광복군의 총에 말이다.

안중근은 2남 1녀를 뒀다. 큰아들은 6세 때 의문사했다. 둘째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망부(亡父)를 대신해 속죄한다"고 사과함으로써 평생 '변절자' 시비에 휘말렸다. 맏딸 안현생이 그녀의 어머니였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1909년)가 있자 안현생은 서울 명동 수녀원에서 프랑스 신부의 보호 아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세 때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가족과 합류했다. 그 뒤 안중근 가족은 임정(臨政)이 있는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로 이사했다. 안현생은 거기서 독립운동하던 황일청과 만나 결혼했다.

황일청은 신흥무관학교(당시 이시영이 설립한 독립군 양성기관)를 나와 상해 임정 초대 군무부 참사를 했다. 무장독립단체 '구국모험단'의 일원으로 폭탄 제조 기술에 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32년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은 국제적인 사건이었어요. 폭탄 제조와 관계돼 아버지도 용의선상에 올랐다고 합니다. 대대적인 조선인 검거 바람이 불었어요. 이를 피해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로 옮겨갔어요. 그 뒤 다시 충칭(重慶)으로 옮겼고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졌어요. 그 뒤 상하이는 일제에 완전히 점령됐습니다. 일제는 아버지를 체포해 평양으로 강제 압송했어요."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상하이에서 외할머니(안중근 부인)와 함께 남았고, 어머니는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따라갔어요. 아버지는 거기서 5년간 연금 생활을 했습니다. 그 뒤 일본 담당자가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의 거류민 단장으로 발령받으면서 아버지를 '조선인 교민회장'으로 데려갔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도 쉬저우로 옮겨가게 된 겁니다. 일본인 동네에 방 두 칸을 줬어요."

―'조선인 교민회장'이라면 일제의 행정조직 안에 있는 겁니까?

"일본놈의 녹(祿)을 먹었느냐는 물음이군요. 안 그러면 우리 가족이 뭘 먹고 살았겠어요? 자발적으로 쉬저우(徐州)에 간 것이 아니라 강압에 의해 끌려갔어요. 거의 포로 생활이었던 거죠. 그걸 '부역'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어요."

―아버님이 변절·친일(親日)을 했다고 보지는 않습니까?

"위안부나 학도병에 끌려간 것을 '친일(親日)했다'고 하는 소리나 같겠지요. 아버지가 거기서 친일을 했으면 그 뒤 그런 증언이 나왔을 테고 친일파 명단에 올랐겠지만 그건 없습니다."

―1941년 부모님이 국내에 들어와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位牌)가 안치된 박문사(博文寺·현 신라호텔 자리)에서 분향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일제가 '만선(滿鮮) 시찰단' 이름으로 중국에 사는 조선인들을 인솔해 분향하게 했어요. 부모님이 거기에 끼어 있었어요."

―이보다 2년 전 외삼촌인 안준생(안중근의 아들)이 그렇게 참배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는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한다" 사과해 일본의 선전도구가 됐지요. 백범 김구가 '민족 반역자 안준생을 처형하라'는 공고를 냈다면서요?

"백범은 과격했잖아요. 임정(臨政)의 지도급 인사로서 신중치 못한 언행이었어요. 당시 안 의사 유족을 돌봐주는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외삼촌(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지고 힘겨운 삶을 살았어요. 일제에 끌려가서 강제로 그렇게 했을 때 본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런 걸 돌아보지 않고 어떻게 '변절' '민족 반역자'라고 말할 수 있나요."

이런 세상 여론 때문에 안준생은 해방이 된 뒤에도 상하이에 남았다. 중국이 공산화가 되자 1951년에야 국내로 들어왔다. 6·25 동란 중이었다. 당시 그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방장관인 손원일 제독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적십자선(船)에 외삼촌을 입원시켜줬어요. 어머니와 문병을 가니 외삼촌 얼굴이 시커멨어요. 작별할 때 베개 밑에서 돈을 꺼내 '만년필을 사라'며 주셨어요. 그게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그녀의 가족은 중국 쉬저우(徐州)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본군에서 벗어난 조선 학병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귀국선을 타려면 반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그때까지 황일청은 집 아래층에 교민 자녀를 위한 '서주 한국 중학교'를 열었다. 학병들로 교사진을 꾸렸다. 고(故) 안병욱 숭실대 교수(철학과)도 학병 중 한명이었다.

그런데 귀국행 배를 타기 위해 충칭(重慶)에서 상하이로 내려오던 광복군(제 3지대) 40여명도 여기로 들어왔다. 해방된 뒤 중국의 한 도시에서 광복군과 학병이 맞닥뜨린 것이다.

"광복군은 자기 말을 따르라며 점령군처럼 행세했어요. 아버지나 학병들을 일본군의 앞잡이처럼 봤겠지요. 학병들과 마찰이 심할 수밖에 없었지요. 아버지는 중재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그러다가 변을 당한 겁니다. 1945년 12월 3일이었지요."

―여사님은 당시 17세였는데 현장에 있었나요?

"밤 10시쯤이었어요. 겨울밤이라 거리는 조용했지요. 나는 전깃불을 켜놓고 학병에게 수학을 배우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수(繡)를 놓고 있었고요. 그때 아버지가 계시는 방에서 '꽝' 하는 굉음이 들렸어요. 아버지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쏜 것이었어요. 범인은 우리 가족 모두를 죽일 요량으로 우리 쪽 방문을 열었어요. 순간 학병이 '이놈' 하며 문 앞으로 달려가 왼손으로 총구를 막고 발로 걷어찼어요. 범인은 2층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뒤 달아났어요. 도주하다가 중국 공안에 잡혔어요. 범인은 광복군이었어요."

―아버지가 '친일파'라는 이유로 임정에서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설도 있더군요.

"그건 모르겠어요. 설령 친일파를 단죄하겠다고 해도 공개적으로 체포해 조사나 재판을 했어야 옳지, 야밤에 하수인을 보내 총 쏘고 도망가는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일제 치하도 아니고 해방을 맞고서 아버지가 이국 땅에서 동포 손에 돌아가신 일을 생각하면 너무 분해요."

―암살 직후 임정에서는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임정에 있던 이범석 장군(초대 국무총리)이 아버지의 친구였어요. 이범석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 부인을 보내 우리를 위로했어요. 어머니는 충격으로 몸져누웠고, 나는 이범석 장군의 부인과 함께 먼저 귀국했어요. 이듬해 5월 부산에 도착했어요."

―임정 주석(主席)이었던 백범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 귀국해서 곧바로 경교장을 찾아갔어요. 백범은 방에서 두루마기 차림을 하고 계셨어요. 백범에게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암살당했어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세요'라며 울었어요. 백범은 입을 꽉 다물고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백범을 '할아버지'로 부르는 사이였습니까?

"상하이 임정 시절 우리 집에 아버지를 만나러 오곤 했어요. 무릎 위에 어린 나를 앉히고는 '말 탄 양반 털럭 털럭/ 소 탄 양반 끄덕 끄덕'이라는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그러다가 바깥에서 집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면 뒷문으로 후닥닥 달아나는 모습이 기억나요."

―그 뒤 어머니(안현생)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귀국 후 먹고살려고 전구(電球) 장사를 하고, 사기도 많이 당했어요. 나중에 대구 효성여대(현 가톨릭대)에서 불문학 교수로 있다가 57세에 고혈압으로 돌아가셨어요. 남편에 대한 한을 삭이지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