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논설주간

대한민국의 성공 기적을 깎아내리는 데 열중하는 국사 교과서들은 바로잡아야 한다. 참혹한 실패라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한 북한을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국사 교과서들을 그대로 둘 수도 없다.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그 못지않게, 어떤 점에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세계사 교육 실종 사태다.

우리나라는 미국·영국·프랑스 등과는 달리 초등학교 때 별도 역사 과목을 두고 가르치지 않는다. 학생들이 역사책을 처음 접하는 건 중학교 때다. 중학교 2년간 배우는 역사책에서 국사 대 세계사의 비중은 6 대 4 정도다. 이것이 우리 국민이 세계사를 배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세계사는 성격상 고교 교육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고교에서 세계사는 1년짜리 선택 과목이다. 실제 세계사를 선택해 1년이라도 배우는 학생은 연도별로 4~6%에 불과하다. 고교로 올라갈수록 세계사 비중이 커지는 선진국과는 반대다. 심지어 북한도 고교 세계사가 필수라는데 개방 국가라는 우리는 세계사를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다.

94~96%의 학생이 중학교 때 맛만 본 세계 역사에 대한 지식(?)으로 이 글로벌화된 세상을 살아야 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중규모 개방 경제인 한국의 교실에서 바깥 세계를 가르치지 않고 또 그것이 문제가 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달리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의 교양과 식견이 그 원천이다. 인간의 지혜와 식견은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 나와 남이 무엇이 같고 다른지를 아는 데서 나왔다. 그래서 자신과 세계의 역사는 언제나 교육의 중심에 있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우리 20대 젊은이 중에 로마제국, 오스만 튀르크제국, 대영제국의 성쇠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과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영국에서 의회민주주의가 나오게 된 과정, 프랑스에서 공화국 혁명이 일어난 이유와 결과, 찬란한 이슬람 문명의 흥망, 1·2차 세계대전, 서양 미술·음악사와 같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든 기초에 대해 기본 줄거리라도 얘기할 수 있는 젊은이도 잘 보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젊은이도 많지 않고, 러시아가 언제 어떻게 영토를 넓혀 우리 동해까지 왔는지 아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온 국민을 유식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기본 상식은 갖자는 것이다. 그 상식은 고교 때 배워 일생 갖고 가는 양식이 돼야 한다. 이 과정이 없다는 것은 국민 교육의 포기다.

필자의 고교 시절 세계사 공부는 따분하고 힘들었다. 그래도 그게 평생 상식의 바탕이 됐다. 다만 교과서와 가르치는 방식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나중에 역사 공부의 중요성과 재미를 알게 되면서 아쉬움은 더 커졌다. 국민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상식과 교양을 친숙한 방식으로 제공한다는 생각이었으면 쳐다보기 싫은 교과서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기에 세계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없다고 본다. 필자 세대의 사람들에게도 이슬람과 중앙아시아 역사는 공백처럼 뚫려 있다. 저 광활한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 그들이 이룩했던 놀라운 문명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역사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정기적으로 모여 세계사 공부를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 우리 역사가 더 잘 보인다고 한다. 더 풍부하게, 더 다양하게 보인다고 한다. 우리의 위치가 어디였고, 지금은 어디인지 저절로 파악되더라고 한다. 중국 역사와 일본 역사를 함께 읽으니 우리 뒷모습까지 보이더라고 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나라들은 자국사와 세계사를 연계해 가르친다. 우리도 해방 후 첫 교육과정에선 그렇게 하다가 그 후 오히려 퇴보해 왔다. 연계는커녕 세계사는 없어지고 국사는 논란 많은 근현대사만 기형적으로 커져서 이 소란이다.

당국자에게 세계사 교육 실종에 대해 물었더니 그도 "큰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해결 방법이 없다고 했다. 세계사를 다시 필수과목으로 바꾸는 것은 다른 과목 이해 집단의 반발 때문에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교육과정과 체계를 전반적으로 뜯어고치는 기회가 아니면 세계사 교육을 다시 살리기 어렵다"고 했다. 세상에 무슨 이런 나라가 있나 싶다.

세계사는 일부 지식인의 전유물일 수 없다. 사람의 생각을 풍요롭게 하는 궁전이고 가슴을 적셔주는 우물이다. 저 나라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며, 왜 저렇게 생각하는지는 좁아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상식이기도 하다. 국민 교육이 아무런 철학 없이 대학 입시의 종속물로 전락하더니 이제는 국민에게 세계 역사도 가르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공계 지망생이라고 세계 역사를 몰라도 된다는 것도 황당한 사고방식이다. 국사 교육의 편향성을 고치자는 이 기회에 세계사 교육의 실종 문제도 함께 공론화해 그 심각성만이라도 알려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