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 수석논설위원

돌담을 넘나들며 연기가 흘러간다. 저녁밥 짓고 군불 지피느라 굴뚝들이 연기를 뿜는다. 고택(古宅) 마당에선 이른 낙엽을 태운다. 맵싸하고 구수하다. 가을 내음이다. 낮게 기운 햇살이 연기를 뚫고 빛내림을 한다. 나른하고 아련하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다. 어려서 동네를 쏘다니며 지치도록 놀던 때처럼. 어머니가 문앞에 나와 이름 부르며 "밥 먹어라" 외치는 소리가 환청으로 맴돈다.

한글날 산청 남사마을 예담촌에 묵으며 돌담길을 걸었다. 옛 담이 아름다워서 예담촌이다. 지리산 동쪽 자락 남사천이 마을을 휘감아 남강으로 간다. 돌담은 700년 된 동네 고샅 따라 3.2㎞를 늘어섰다. 남사천 강돌을 날라다 쌓았다. 큰 막돌로 이층 메쌓기를 한 위에 성기게 돌 올리고 황토를 채워넣었다. 기와 얹어 비를 가렸다. 어머니처럼 수수하고 누이처럼 다소곳하다.

최씨 고가(古家) 들어서는 골목 돌담은 화폭이다. 무심히 쌓은 듯해도 파르스름한 돌과 불그스레한 흙이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담벼락은 생명도 키운다. 담쟁이 잎이 선홍빛으로 물들어 간다. 덩굴이 기어가며 자잘한 포돗빛 열매를 맺었다. 돌 틈 메마른 흙에서 맨드라미가 빨간 꽃을 피웠다. 고사리가 철없이 푸른 잎으로 자란다.

천변으로 가는 고샅길 돌담은 1m쯤 안으로 휘었다. 거기 선 이백살 감나무를 피해 움푹 들어갔다. 수고롭게 담을 에둘러 쌓아 나무를 보듬은 마음이 넉넉하고 따스하다. 처마를 뚫고 나온 감나무도 있다. 축사와 창고 슬레이트 지붕에도 솟았다. 감나무를 뽑느니 대신 지붕을 뚫어 살렸다.

마을엔 감나무가 많다. 잘 크고 감이 잘 달려 "꽂으면 자란다"고 한다. 결실에 겨워 처진 가지가 쏟아질 듯 돌담에 드리웠다. 마을에 처음 터 잡은 하씨 감밭엔 육백열살 감나무가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이 잰 수령(樹齡)이 그렇다. 세종 때 영의정 하연이 심었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이끼 낀 고목이 싱싱한 감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감밭은 발 딛기가 조심스럽다. 이끼 푹신한 바닥 가득 낙과가 뒹군다. 한 개 주워 들었다. 그새 홍시로 익은 과육을 후루룩 들이마셨다. 꿀같이 달고 수정과처럼 시원하다. 감이 그리는 다홍 점묘화는 마을 가을 풍경의 으뜸이다. 늦가을 곶감 빚는 게 일이지만 우듬지 감들은 그대로 둔다. 간짓대가 닿아도 굳이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남긴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며 주린 겨울 새의 먹이가 된다.

마을엔 노거수(老巨樹)가 즐비하다. 이씨 고가 들머리에 껴안듯 비껴 선 회화나무 한 쌍만 해도 삼백살 먹었다. 손잡고 지나면 해로한다는 '부부 나무'로 사랑받는다. 마당엔 마을서 제일 큰 사백쉰살 회화나무가 버티고 섰다. 가을이 깊어 가는데 아까시처럼 푸른 잎이 거목을 뒤덮었다.

숙종 때 이씨 집안 효자를 기리는 사효재엔 오백스물다섯살 향나무가 있다. 실타래처럼 꼬인 줄기가 가지 뻗어 마당을 향내로 채운다. 정씨 고택 사양정사의 백스무살 배롱나무와 이백스물다섯살 단풍나무도 크고 잘생겼다. 천변 둘레길 오백살 팽나무 두 그루까지 고목(古木)과 명목(名木)을 주워섬기기도 벅차다.

봄이면 마을에 꽃구름 같은 매향(梅香)이 번진다. 입향조(入鄕祖) 원정당 하즙이 심은 칠백살 원정매는 수명을 다했지만 곁에서 손자 나무가 대를 잇는다. 몇백살 노매(老梅)만 다섯이다. 남사 오매(五梅) 보러 탐매(探梅)꾼이 줄을 잇는다.

연휴여선지 마을이 꽤 붐볐다. 뜻밖에 젊은 사람이 많다. 쥐고 다니는 안내문 약도에 여남은 명소 말고 색다른 게 있다. '이호신 화백 작업실'이다. 곳곳 안내판에도 표시해놓았다. 5년 전 귀촌해 그림 농사를 짓는 화가 이호신의 화실이다. 담장이 감나무를 에둘러 가는 그 집이다.

이호신은 30년 가까이 배낭 둘러메고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산과 들, 마을과 마을사람을 화첩에 사생(寫生)했다. 그는 허투루 보지 않고 마을에 스며들었다. 사람들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방을 얻어 자고 밥도 둘러앉아 먹었다. 이웃 같고 식구 같은 정(情)을 풍경과 인물화에 담았다. 그것을 스스로 '생활 산수(山水)'라고 불렀다.

'길 위의 화가'는 25년 전 산청과 인연을 맺었다. 남사마을을 드나들며 돌담과 고택과 나무와 꽃에 마음을 뺏겼다. 사철 마르지 않는 사생감이다. 양반촌이면서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사는 각성(各姓)바지라는 것도 좋았다. 마을은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나그네를 품어줬다. 그는 "알 수 없는 산수벽(癖)에 씌었던 유랑길"을 접었다.

그는 마을과 사람을 그려 책 쓰고 전시회도 했다. 전경은 마을 안내문에 들어갔다. 마을이 낳은 독립운동가 곽종석과 국악학자 박헌봉 진영(眞影)을 그려 기념관에 바쳤다. 저녁 먹은 음식점 천장 마룻대에 '이곳 음식이 즐거움과 건강 주기를 소망하며'라고 쓰여 있다. 그가 쓴 상량문이다. 차림표와 메뉴책에도 매화와 홍시를 그려줬다. 그가 이웃과 인사하는 걸 보니 영락없는 토박이다. 마을과 그가 맺은 인연이 부럽고 아름답다.

남사마을은 내일 16일 풍물패 불러 조촐한 축제를 연다. 돌담길 걸으며 거목들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한나절이 짧다. 홍시와 인심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