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스마트폰 진동 소리가 울리기라도 하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눈치를 줬다. 그러면 조용히 꺼버렸다. 국내 대회에서는 비가 내리면 우르르 코스를 떠나던 사람들이 미동도 안 했다. 앞줄에 있는 이들은 뒷줄 사람들을 위해 우산을 펴지 않고 비를 맞았다. 무질서하기로 악명 높았던 한국의 갤러리 문화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좋은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고 박수를 보냈고, 오히려 스타가 많은 원정팀 미국 선수들에게 더 많은 갈채가 쏟아졌다. 미국 선수들이 한국 팬들의 특이한 문화에 "우리가 원정팀 아니었나?" 하며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2015 프레지던츠컵(유럽을 제외한 세계연합팀과 미국팀의 골프 대항전)이 11일 인천 송도의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코리아에서 명승부로 막을 내렸다. 국내에서 열린 골프 대회에 갤러리가 연일 2만여 명씩 모두 10만명이 모인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회 하루 전 최경주는 "이 대회가 전 세계에 중계되는데 이미지 구기는 모습이 나오면 큰일"이라고 걱정했다. 몇 해 전 국내에서 열렸던 유럽투어 발렌타인 챔피언십에서 선수가 친 볼이 카트 도로를 타고 구르자, 갤러리가 발로 막아 방향이 바뀌던 장면이 중계 화면을 타고 전 세계로 퍼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기우(杞憂)였다. 세계 랭킹 1위 조던 스피스(22)와 노장 필 미켈슨(45)에게 너무 많은 팬이 몰려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요구해 약간 잡음이 있었지만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우승컵을 들고 있는 미국팀의 조던 스피스(왼쪽 사진). 프레지던츠컵 우승을 확정한 미국팀의 잭 존슨(왼쪽에서 둘째)이 데이비스 러브 3세(왼쪽), 맷 쿠차(오른쪽)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오른쪽 사진).

['아틀란티스(Atlantis)' 같은 풍경… 2015 프레지던츠컵은?]

이번 대회는 세계연합팀의 홈경기였지만 미국은 원정 텃세를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이 홈팀 같을 때가 잦았다. 가장 많은 팬을 몰고 다닌 스피스는 "한국에 이렇게 많은 나의 팬이 있는지 몰랐다"고 했고, 더스틴 존슨은 "원정 경기를 가면 야유가 쏟아지기 마련인데 나흘 동안 계속 박수를 받았다"고 했다. 잭 존슨은 "내가 그린에 갈 때는 성조기를, 호주 선수가 올라가면 호주 국기를 흔들더라"고 했다. 미국과 유럽이 벌이는 라이더컵에선 상상도 하기 힘든 풍경이다. 호주나 남아공 등에서 열렸던 프레지던츠컵에서도 이런 광경은 없었다.

국내 팬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초장거리 드라이버샷에 "굿 샷"을 외치며 환호했다. 이번 대회엔 올 시즌 PGA 투어의 장타 부문 '5강'인 더스틴 존슨(미국·317.7야드), 버바 왓슨(미국·315.2야드), 제이슨 데이(호주·313.7야드), 애덤 스콧(호주·311.6야드), J.B. 홈스(미국·309.9야드)가 모두 출전했다. 이런 모습이 특이했던지 미국 골프채널 해설가는 "한국 팬이 가장 좋아하는 샷은 드라이버 샷"이라고 했다.

구경은 가도 좀처럼 물건은 사지 않던 국내 팬들도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를 이번 대회에선 지갑을 열었다. 테일러메이드 코리아의 원지현 부장은 "예상보다 서너 배의 기념품이 팔려 급하게 추가로 물건을 갖다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의 정상급 골퍼들에게 대회장이 있는 송도국제도시는 비현실적인 '아틀란티스(Atlantis)' 같은 풍경이었던 모양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인천대교를 건너면 송도는 바다 위에 떠오른 신기루처럼 보인다. 대회 코스 설계자인 미국 골프의 전설 잭 니클라우스는 "바다로 사라진 이상향 아틀란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다. 이 대회를 중계한 NBC와 미국골프채널은 연일 "바다와 고층 건물의 스카이라인, 세계 최고 수준의 골프장이 어우러진 완벽한 조건에서 대회가 열리고 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대회를 주관한 미국 PGA 투어의 팀 핀첨 커미셔너는 "팬들의 열기와 흥행, 대회 내용 등이 모두 완벽했다"며 "한국에서 다시 이 정도 규모의 국제대회를 열어도 좋겠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