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왼쪽), 토머스 머튼.

예상을 뛰어넘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침없는 미 의회 연설이 미국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름도 생소한 급진주의자인 도로시 데이와 토머스 머튼을 위대한 미국을 만드는 데 공헌한 인물로 거론한 것이 미국 보수층에 당혹감을 던졌다.

지난 24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의사당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민자 포용, 사형제도 폐지, 빈부격차 해소, 기후변화 문제 등 현실 정치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민감한 사안들을 거침없이 거론했다. 이 발언들은 민주당 쪽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었지만 연설 후 정파적 반응은 최대한 자제됐다. 공화당 소속인 로이 블런트 상원의원은 "한 번쯤은 우리가 누구인지보다는 우리가 이곳에서 뭘 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의회도 알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고, 애덤 킨징어 하원의원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위와 관계없이 언제나 겸손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며 이것은 워싱턴 정가에 꼭 필요한 교훈"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하지만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동렬에서 도로시 데이(1897~1980)와 토머스 머튼(1915~ 1968)을 거론한 데에는 좌편향이라는 비판까지 제기됐다. 도로시 데이는 사회당에 입당해 사회주의 신문 기자로 일했고 '가톨릭 노동자운동'을 이끌다 연방수사국(FBI)의 감시를 받은 인물이다. 평소 데이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왔던 민주당 대선 주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도로시 데이처럼 급진적인 인물이 (연설에서) 언급되는 일은 매우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토머스 머튼은 뉴욕 빈민가인 할렘의 흑인들에게 자신의 물건을 모두 나눠주고 가톨릭 수도사가 된 후, 영성의 의미와 가치를 세상에 전달한 사상가였다. 교황은 그를 "시간을 넘어 영혼과 교회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젖힌 사상가"라고 칭송했다.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교황은 검소, 겸손, 자기 헌신을 강조하는 예수회 출신으로 대주교가 된 후에도 주교관 대신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빈민활동을 해왔다. 교황이 이들을 높이 평가한 것은 좌파적 이념 때문이 아니라 교황의 이 같은 성향과 데이·머튼이 통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됐다.

워싱턴에선 노숙자들도 만나 - 프란치스코 교황이 24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의회 연설을 마친 뒤 인근 성당에 들러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제공받는 노숙자들을 만났다.

공화당 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는 CNN 방송 인터뷰에서 교황 연설 내용을 비판했다. 그는 "교황을 존중하고 좋아한다"면서도 "불법 이민자들이 엄청난 범죄를 일으킨다"며 불법 이민자 추방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도 "산업에 영향을 미칠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일자리를 위험하게 만들고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며 반대했다.

연설 이전부터 교황이 현실 정치적인 발언을 할 것으로 보고 이를 반박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종교로부터의 자유재단(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이라는 보수 단체는 교황의 연설이 열리기 직전 배달된 24일자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일간지에 "종교와 정치가 결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전면 광고를 싣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국가적 이상에 대해 종교적 설교와는 전혀 거리가 먼, 확고한 선언을 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