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 조안면 마현(馬峴) 마을은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나고 죽은 마을이다. 동쪽으로는 북한강과 남한강과 경안천이 만나 물안개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운길산이 구름을 막는다. 1973년 마현 마을 앞에 팔당댐이 들어서고 산들은 섬이 되었다. 팔당호 한가운데에는 소래섬이 있다. 이른 아침이면 섬에 갇힌 나무들은 물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몽환(夢幻)도 그런 몽환이 없다. 몽환 너머 반대쪽 호수변에는 남종면이 있다. 행정구역은 광주시다. 남종면에는 조선 백자 도요지가 있다. 다산과 다선(茶仙) 초의선사가 운길산 수종사에서 다향(茶香)을 논하던 그때, 남종면에서는 도공(陶工)들이 불과 전쟁을 벌였다. 왕실용 명품 자기를 만들며 섭씨 1000도가 넘는 가마불 앞에서 전쟁을 했다. 세월이 가서, 다산도 갔다. 다산과 도공들이 살던 마을 사이에는 큰 호수가 생겨났다. 다산은 이름을 남겼다. 도공들은 여전히 무명씨(無名氏)다.

▶▶팔당호 마름 밭과 오리

1973년 말 팔당댐이 7년 만에 완공됐다. 28m 높이 댐은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다. 자연계와 인간계 모두 변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에서 서울까지 가던 수운은 호수에서 멈췄다. 호수 주변에 크고 작은 관광지가 생겨나 주말이면 호수는 늘 붐빈다. 강물이 호수에 고이면서 풍경도 변했다. 호수 주변 얕은 곳에는 푸른 마름이 떼를 지어 자라난다. 오리며 백로, 왜가리들은 그 마름 밭을 멋대로 돌아다니며 배를 채운다. 제일 멋진 팔당호를 볼 수 있는 곳은 남종면에 있는 경기도팔당수질개선본부 9층 전망대다.

팔당호 마름밭에 오리가 바쁘다. 호수 깊이만큼이나 사람들 삶은 사연도 깊다. 이름 모르는 도공들이 땀을 흘렸고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흔적을 남겼다. 팔당전망대 통유리를 통해 찍었더니 유화 같은 색깔이 나왔다. 렌즈=캐논 70-200mm 1:2.8 IS2 USM 셔터 스피드=1/125초, 조리개=f11

다산과 다선이 차를 홀짝이던 호수 건너 운길산, 그 아래 호수, 그 속 소래섬과 겸재 정선의 작품 '독백탄(獨栢灘)'에 나오는 족자도, 푸른 마름 밭과 새들 무리 등등 상상할 수 있는 풍경화의 모든 요소가 네모난 통유리 액자 속에 펼쳐진다. 음료수를 홀짝이며 이 풍경화를 감상만 해도 광주 여행은 본전을 뽑는다. 그 풍광 옆에서 도공들은 불과 싸웠다. 도요지는 전망대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분원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사옹원 광주 분원과 무명씨(無名氏)들

남종면 사람들은 18세기 중반 이후 왕실용 그릇을 만들었다. 공식 기록으로 1752년부터 1884년까지 이곳 분원리에 관요(官窯)가 운영됐다. 왕실 음식을 관장하던 사옹원(司饔院)이 설치한 관영 그릇 제조 공장이 이곳에 있었다. 산이 많아 가마를 지필 땔감이 많고 세 강이 만나는 합수지에 있다 보니 한양까지 물길도 좋았다. 그곳에서 광주 사람들은 백자를 만들었다. 대접, 접시, 잔, 제기, 향로, 벼루, 연적과 병 기타 등등 종류도 많았다. 왕실 납품용이다 보니 품질은 최상급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릇 만드는 장인 380명에 나무 베고 불 때는 단순 인력은 10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장인 집안은 세습됐다. 자기 마을이라고 해도 좋을 규모였다.

1884년 고종이 전국 관요를 민영화했다. 분원은 몰락했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 화려하고 값싼 일본 그릇들이 들어오면서 분원리 민간 공장은 완전히 사라졌다. 경쟁이 되지 않았다. 도공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1921년 분원 도요지 터에 분원초등학교가 개교했다. 2001년과 2003년 두 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됐다. 작업이 끝나고 가마터 뒤편 폐교실을 개조해 백자자료관이 문을 열었다. 가마터는 잔디밭으로 변했다. 잔디밭 앞에는 사옹원에서 파견된 관리들 선정비를 모아놨다. 흙 만지고 불 피워 그릇을 만들어낸 도공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운동장과 뒷동산에는 백자 파편이 발에 차인다. 완전히 사라지게 된 이유가 있었다. 한순간의 일이 아니었다.

▶▶가나가에 산페이와 일본 자기 산업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을 끌고 간 일본은 화려한 채색 그릇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종전 후 100년이 채 안 돼 일본은 빨갛고 노랗고 푸른색으로 문양과 풍경을 그려 넣은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했다. 유럽 왕실에 일본 자기 열풍이 불었다.

조선 왕실과 주류학자들은 성리학을 내세워 담백함과 검약을 강조하고 사치를 금지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이 화려한 그릇을 대량 생산하고 있을 때, 조선 도공들은 오로지 백자를 만들었다. 일반 대중들은 사치품 제조와 유통과 구입이 금지됐다. 왕실과 권력층은 일본제 채색 자기를 수입해 즐겼다.

그때 일본은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 채색 자기 제조법을 배워와 대량 생산을 했다. 북학파 실학자 이희경(1745~1805)은 이렇게 말했다. "멀리 찾아가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능히 그 방법을 배웠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설수외사(雪岫外史)'에서)

일본 채색 자기의 시조는 아리타(有田) 자기다. 아리타 자기를 창업한 사람은 가나가에 산페이(金ヶ江三兵衛)다. 가나가에는 정유재란 때 끌려간 도공 이삼평이다. 운명은 그리되었다. 조선 도공들은 이념 속에 갇힌 채 부(富)와 명예를 소유할 기회를 놓쳐버린 건 아닐까. 광주 분원 도요지는 고단하게 살다 사라진 무명씨들의 흔적이다.

▶▶무명 도공의 환생, 오포읍 유리병 공장

분원리에 관요가 최종 정착하기 전, 사옹원은 땔감을 찾아 광주 일대 100군데가 넘는 곳을 옮겨 다니며 관요를 만들었다. 경안천이 흐르는 오포읍에는 초기 관요지들이 있었다. 우연일까, 오포읍에는 지금 유리병을 만드는 공장 열 개가 모여 있다. 재료를 고온으로 녹이고, 형태를 만들어 식혀서 내는 제조 방식은 자기나 유리병이나 똑같다.

문형산 고개 너머 고산리 산중에는 여섯 개 공장이 함께 유리병을 만든다. 승일유리라는 회사가 만든 전기로를 나눠 쓰며 24시간 365일 작업을 한다. 다섯 명이 한 팀으로 전기로에서 봉으로 유리물을 꺼내 금형에 부어 병을 만든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전기로 사방으로 냉풍 파이프가 어지럽다.

일찍 남편을 떠나보낸 고모를 도와 1990년부터 공장을 운영하는 사내는 마흔다섯 살 먹은 전무 최봉재다. 그가 말했다. "막말로, '빤스'만 입고 화로 앞에서 유리를 배웠다. 내가 경력이 15년인데, 나이도 경력도 최소다." 직원 마흔여덟 명은 유리를 만진 지 최소 30년이 넘었다. 못 배우고 가난해서 뛰어든지라, 30년 넘은 직원 나이가 쉰 살이 되지 않는다.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 먹여 살리겠다고 뜨거운 화로 앞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조선 초기 도요지가 있던 오포읍 승일유리 작업장. 현대의 도공들이 화로 앞에서 유리병을 만든다. 렌즈=삼양옵틱스 14mm 1:2.8 ED AS IF USM, 셔터 스피드=1

이 21세기의 무명 도공들은 낯선 카메라에 큰 웃음 한번 터뜨리고 작업대로 시선을 옮기곤 했다. 공간을 가득 채운 냉풍 파이프들 틈에서 그들은 진지하게 웃었고, 진지하게 유리물을 꺼내고 진지하게 토론을 하며 병을 만들었다. 무명 도공들과 그들은 닮았다. 열정도 닮았고 일하는 방식도 닮았고 삶의 진행 방식도 닮았다. 이름의 유무(有無)에 달관한 모습도 닮았다.

디자인이 복잡한 병은 수작업으로 만들지만 형태가 단순한 병은 자동화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다. 향수 병 같은 화장품 병이 그런 병이다. 승일유리가 납품하는 LG 계열 화장품 회사 또한 디자인이 까다로운 병만 이곳에 주문한다.

대량 생산한 고품질 자기에 밀려 조선 자기가 쇠락했듯, 수동으로 만드는 그들의 유리병은 찾는 이가 적다. 최봉재가 말했다. "작업이 고되니 오겠다는 사람도 없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느낌이다." 일본이나 프랑스 화장품 회사에 납품할 생각도 해봤지만, 100만개 단위로 이뤄지는 주문 물량은 그림의 떡이라고 했다.

▶▶순교자의 무덤과 왕자의 무덤

광주에 무명씨들만 남은 것은 아니다. 분원리에서 30분 거리에 천진암이 있다.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 신자들이 천주교를 공부했던 곳이고, 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등 천주교 초기 신도들 무덤이 있는 곳이다. 다산 또한 강 건너 천진암으로 자주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가톨릭에서 100년 계획으로 성지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천진암에서 고속도로로 북상하면 남한산성 뒤편 엄미리 계곡 꼭대기에 의안대군 묘가 있다. 조선 개국 초기 왕자의 난 때 이복 형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이방석과 부인의 무덤이다.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은 단풍빛으로 물들고, 밀집한 맛집들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무덤 가는 길은 한적하고 조용하다.

묘는 20세손 종부 안미화자(76)가 지킨다. "30년 전 남편과 함께 문경새재보다 더 험한 길을 걸어올라 조선에서 가장 엉망진창인 묘막 고치며 살다 보니 세월 다 갔다"고 했다. 1998년 TV 드라마 '용의 눈물' 당시 찾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종친회 사람들과 견학 오는 어린이 정도뿐이다. 안내문에 '태종'이 '태로'로, '숙종'이 '속종'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적혀 있어도 누구 하나 고칠 생각을 않는다.

비극적으로 죽은 왕자의 흔적, 사라진 무명 도공의 추억, 오늘을 사는 이들의 진지한 자세 그리고 열심히 수초 더미를 뒤지는 물새의 몸짓까지 다 흘려보냈다. 호수에 가을이 왔다.

[광주 여행수첩]

1. 추천 동선(서울 기준·내비게이션 검색어도 동일): 의안대군방석묘→경기도수자원본부→분원백자자료관→얼굴박물관→천진암

2. 각 방문지 정보: ①얼굴박물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지낸 김정옥 교수가 만든 박물관. 얼굴에 관한 모든 것이 전시돼 있다. 전시장 초입은 산만하지만 2층과 석물을 전시한 야외전시장과 강진에서 옮겨온 고택은 볼만하다. 고택 숙박도 가능하다. 월, 화 휴관. 수, 목은 예약 관람. 백자자료관 부근이다. 4000원. www.visagej.org, (031)765-3522 ②수자원본부 전망대 연중무휴, 무료. paldang.gg.go.kr, (031)8008-6937 ③의안대군방석묘 엄미리 계곡 끝. 주차공간이 좁으니 길이 좁아질 무렵 길섶에 주차하고 걸어갈 것. ④백자자료관 분원초등학교 안에 있다. 주차장은 학교 건너편. www.bunwon.or.kr, (031)768-8455, 1월 1일 휴관.

얼굴박물관 전경.

3. 맛집: 메밀꽃(광주시 중부면 엄미길 19) 엄미리 계곡 초입. 메밀국수 7000원. (031)761-5468

4. 숨은 그림 찾기: 권력자의 별장. 유신 시대 권력자에게 상납하려고 누군가가 만든 아흔아홉 칸짜리 집. 유신 종언과 함께 없던 일이 돼 버렸다고 한다. 엄미리 계곡 뒤편에 숨어 있다. 지금은 농장으로 변했다. 입구에 큰 철문. 주민들은 "그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 끝에 진짜 대문이 나온다"고 했다.

5. 오포읍 유리병 공장: 승일유리 홈페이지는 www.siglass.co.kr

6. 광주 문화관광 홈페이지: tour.gjcit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