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소설가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이른바 '먹방'의 열풍이다. 칼이라곤 잡아본 적이 없을 듯한 남자들이 30년 동안 칼자루를 잡아온 나보다 더 창의적으로 음식을 만들어낸다. 이런 근사한 남자들을 봤나. 요리를 못하는 남자는 좀비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젠 지겹다는 한편의 눈흘김을 비웃듯 매번 더 강화된 콘셉트로 우리의 눈길을 붙든다. 현미경과 축지법, 양자역학과 예술론이 요리에 동원된 지 오래다. 머지않아 북극에서 끓인 물범 수프라든가 달의 표면에서 절구질한 쑥떡의 시식 장면을 보게 될 것 같다.

이런 난리 법석을 보고 있자니 "인간이 누리는 세 가지 사치는 먹는 것, 섹스, 그리고 죽음"이라고 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이 떠오른다. 뜬금없는 것 같지만 곰곰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식욕과 성욕은 죽음이라는 유한성의 거울 앞에서 가장 강렬한 생(生)의 증거이다. 하지만 섹스는 중인환시리에 내놓기엔 꺼려진다는 점 때문에 가장 손쉬운 사치는 결국 '먹는 일'로 귀착된다. 까닭없이 갈구는 '그 인간' 때문에 죽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단 하나 예외 없이 일회성이며 중간에 사용할 수 없다는 속성 때문에 우리는 죽음 대신 낙지볶음이나 떡볶이를 떠올리는 것이다.

인터넷 1인 방송 아프리카로 시선을 돌리면 '먹방'의 스펙트럼은 좀 더 확장된다. 특이한 식재료도, 사막이나 정글도 필요없다. 햄버거나 자장면 등 싸구려 포만감 외엔 기대할 것이 없는 배달 식품들이 등장한다. 화면엔 한 인간이 먹어치우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분량이 전시되어 있다. 콜라의 힘을 빌려 자장면을 흡입하는 청년의 뺨엔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다. 별풍선이 쌓인다. 한 개 100원이라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란다. 별풍선이 모래처럼 쌓여 사막이 된다. 고독하고 막막한 표정으로 묵묵히 면발을 입에 밀어넣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먹는 자와 보는 자는 피학(被虐)과 가학(加虐)의 주체가 된다.

이 지점에서 먹는 일은 포르노로 변하고, 생명의 원초적 행위는 모멸과 비참으로 추락한다. 라캉이 살아 있어 열한 번째 그릇의 비닐을 벗기고 있는 청년을 본다면 어떤 아포리즘을 남길까. 넘쳐나는 음식의 풍경을 배경으로 우리 사회가 열렬히 배고픈 자들의 도시, 허기진 자들의 군대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지극한 맛은 어디에서 오는가. 달콤함이나 시큼함? 상하기 직전까지 숙성한 아미노산? 가끔 사람들에게 "당신 인생의 음식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는 취미가 있는데 그 음식들은 의외로 평범하기 짝이 없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기 전 후후 불며 먹었던 그) 설렁탕, (첫 면회 때 그녀가 손수 싸와서 입에 넣어주던 그) 김밥, 심지어 (하굣길 밭두렁에서 주운 봉투 속 지폐로 사먹었던, 봉투에 적힌 동네 어른의 이름 때문에 죄책감을 함께 씹어야 했던 그) 자장면까지.

그 평범한 것들이 세월이 갈수록 더 환상적인 맛으로 확장되는 까닭은 같이 먹은 사람과 공유했던 행복감 때문일 테고,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던 충만감 때문일 터이고, 생의 중력으로부터 잠시 놓여난 해방감 때문일 것이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 줄도 읽지 않은 사람조차 마들렌이라는 과자 이름은 알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마들렌이 뭐 그리 특별한 맛이던가. 유년의 풍경으로 단숨에 풍덩 뛰어들게 하는 마법의 음식이라면 그게 소금과 물로 반죽한 무교병이라 해도 기억 속에선 점점 부풀어 올라 천상의 맛을 품게 될 것이다.

먹고 마시는 일에 관해서는 13세기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 시인 루미가 정리해 놓았다. 소박한 민낯의 음식 앞에서도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당신의 삶은 정녕 '럭셔리'한 것이라고. 8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봄이나 가을이나, 사람 사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석류꽃과 촛불과 술이 있어요./당신이 안 오신다면,/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