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선천적인 약시를 가족력으로 물려받았고, 자신도 언젠가 실명(失明)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시력을 잃어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뒤에 책의 보고인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된 그는 이 운명을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라고 읊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책을 언젠가 읽을 수 없게 된다는 운명을 알고 있던 보르헤스는 이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책을 외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보르헤스는 두 마리의 드래건을 죽이는 영웅 베어울프의 이야기 '베어울프(Beowulf)'라는 고대 영국의 서사시를 외우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바 있다. 할머니가 영국계였던 그는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관련 강의를 할 정도로 영문학에 정통했다. 영문학 가운데 보르헤스가 특히 좋아했던 것이 앵글로 색슨 문학의 정수 '베어울프'였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오늘날 영국의 자랑인 '베어울프'는 게르만인들의 영웅 서사시 가운데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가장 긴 서사시지만, 이 신화가 펼쳐지는 무대는 영국이 아니라 오늘날의 스웨덴과 덴마크이다. 로마인들이 브리튼 섬에서 떠난 뒤, 유럽 대륙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게르만인들이 자신들의 서사시를 함께 가져온 것이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그러므로 보르헤스는 베어울프를 영국 문학의 진수일 뿐 아니라 고대 게르만 문학의 진수로써 인식했다. 오딘, 토르, 프레야, 프레이, 시귀르드와 같은 신들의 이야기는 유럽 대륙에서 그 형태를 갖췄을 터이나, 이를 "시 에다" "산문 에다" "뵐숭 사가"와 같은 신화책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 것은 북해(北海)의 고도(孤島) 아이슬란드의 주민들이었다. '보르헤스 전집 5: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실려 있는 '운드르' '매수'와 같은 단편에 아이슬란드인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소설과 수필, 강연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고대 게르만 세계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필자는 보르헤스를 읽는 한국 독자들이 이 지점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르헤스에 관한 온갖 책이 출판되는 한국에서, 그가 집필한 개설서 '중세 게르만 문학'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한국어로 번역되어야 할 책이 세상에는 아직 많다. 필자와 같은 인문학자의 임무는 신뢰할 만한 교감과 번역을 세상에 제공하는 것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