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원미숙(56)씨가 '전국 최초 여성 소방서장 취임'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횡성소방서에 도착해 건장한 소방대원들과 함께 걸어올 때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생겼을 것이라는 첫 예상부터 빗나간 것이다. 그녀는 아담한 체구였고 여성스러웠다.

그런 그녀는 '전국 여성 소방관 최초'라는 기록을 매번 세워왔다. 1996년 최연소 소방위, 2002년 소방경, 2008년 소방령, 2014년 소방정(경찰로 치면 서장급)으로 진급할 때마다 여성으로는 처음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소방서장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봤나요?

"생각을 못 했죠. 그 시절만 해도 여성은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그만뒀으니까요."

―1978년 9급 소방사로 들어왔지요?

"신문에 난 공채 시험 공고를 보고 응시한 거죠. 강원도에서 그때 처음으로 여성 소방관을 뽑았어요. 우리 여성 동기가 다섯 명이었어요. 다들 결혼한 뒤로 떠났어요."

―본인만은 어떻게?

"상사와 동료들이 배려해준 덕분이었어요. 저도 중간에 그만두려고 한 적이 많았어요. 직장 일과 가사를 함께 하려니 힘들었지요. 제가 그만둬야겠다고 하면, 당시 소방서장님이 '잘하고 있는데 왜 그러느냐. 좀 참아봐라'며 달랬어요. 그러면서 제 업무를 바꿔주기도 했어요. 사실 민원 창구를 오래 담당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원미숙 강원 횡성소방서장은 “사람 목숨이 위험하다는 신고가 오면 소방관 업무가 된다”고 말했다.

―어떤 종류의 업무 스트레스인가요?

"제가 소방법이나 규정대로 하니까, 민원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들 해왔는데 당신만 왜 그러느냐'며 많이 따졌어요. 술 마시고 와서는 막무가내로 나오기도 했고요. 제가 여성이니까 더했겠지요.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었죠."

―민원인으로서는 '하필 깐깐한 여자 공무원을 잘못 만나…'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요?

"규정대로만 하니 답답했겠죠. 그 때문인지 저는 지금껏 근무해오면서 한 번도 징계를 받지 않았어요."

―화재나 구급 상황에 출동하는 현장 근무는 안 했나요?

"여성 소방관은 행정 업무를 보며 현장 출동대원들의 업무를 보조했어요. 저는 퇴근했다가 다시 나와 밤 9시부터 10시까지 취약 지역을 다니며 가두 방송을 몇 년간 했어요."

―화재 예방 가두 방송을 말하는 겁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웃겠지만, 그때는 스피커 달린 차로 돌아다니며 '곤로에 기름을 넣을 때는 불을 끄고 넣읍시다' '담뱃불을 아무 데나 던지지 마십시오' '사용하지 않는 전기 코드를 뽑읍시다'같은 걸 방송했지요."

―녹음한 걸 반복해서 틀어주는 게 아니고요?

"그때는 늘 육성으로 했어요. 요즘으로 말하면 라이브죠."

―당시 한 조(組)로 차량을 운전하던 소방관과 결혼했다고 들었는데요.

"나이는 저보다 여섯 살 많았지만 소방관으로는 1년 후배였지요. 그게 인연이 된 건지 결혼한 것은 맞아요."

―소방관 부부가 된 뒤로 서로 근무지가 바뀌어 떨어져 산 경우도 있었겠는데요?

"함께 산 날보다 떨어져 산 날이 훨씬 더 많았어요. 주말부부도 아니죠. 주말마다 볼 수도 없었으니까요. 특히 간부가 되면 쉬는 날이라 해도 자기 관할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나중에 우리 가족은 다섯 가구를 뒀다고 했어요."

―다섯 가구라는 것은?

"원주에 살던 집은 비워 두고, 남편과 나, 두 아이가 각각 떨어져 한 가구씩 이뤘으니까요. 다섯 가구인 거죠."

―'부부 소방서장'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지요. 처음이지요."

태백소방서장을 지낸 남편은 2012년 지병으로 작고했다.

―소방관 세계에서 '여성 최초 기록'을 매번 이뤄낸 데에는 어떤 비결이 있지 않겠어요?

"앞서 말한 대로 동료 직원들의 배려나 협조가 없었으면 어려웠을 거예요. 제가 인간성이 좋거나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그때 왜 그랬지. 지금이라면 안 그랬을 텐데' 하며 후회하는 일이 많아요."

―어떤 경우가 후회됩니까?

"행정 업무를 할 때 동료 직원들이 어떤 일을 문의해오면 바쁘다는 이유로 딱딱하게 대했어요. 당시 그런 직원들을 복도에서 만나면 '미안했어. 내가 못돼먹어서 그랬어. 다음에는 잘해줄게' 하고 말을 걸었지만,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업무와 가사를 혼자서 다 하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 좀 더 따뜻하고 포용력 있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가 되죠."

―남성 중심 조직이다 보면 집적거리거나 성적 농담을 할 때도 많이 있었을 텐데요.

"성희롱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저는 여태껏 근무하면서 성적 농담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직원들이 저를 잘 보호해준 것인지 원래 올곧은 직원들만 있었는지…. 요즘 와서 오래된 남성 동료들이 술자리에서 음담패설 같은 걸 꺼내면 '나는 아직 미성년자이기에 그런 말을 못 들어요' 하고 농담해요."

―여성이어서 현장 근무 기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속상하지는 않았고요?

"상사들 처지에서는 여성을 현장에 내보내는 것이 걱정됐던 거죠. 당시 현장 근무는 2교대여서 밤도 같이 새워야 했거든요. 그러다가 1998년에 기회가 왔어요. 저를 여성으로는 처음 소방파출소장(119 안전센터장)으로 내보낸 겁니다. 소방서장님이 대단한 결단을 한 거죠."

―현장에 출동하는…?

"그렇지요. 관할 지역에 불이 나면 선발대 차량을 타고 나가 현장을 지휘하지요. 그 직책을 4년 했어요. 당시 신도시가 형성될 때라 화재 건수가 많았어요."

―직접 소방 호스를 잡고 불을 껐나요?

"소방 호스를 잡지는 않지만 화재 진압 지휘를 하지요. 인력과 장비를 어떻게 투입하고, 어디서부터 불을 끌 것인지, 옆 건물로 옮아 붙지 않게 막는 등 작전을 세워야 하는 거죠."

―그전까지 현장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 그런 지휘가 가능했나요?

"처음에는 당황했죠. 화재 현장에는 이웃 지역 관할의 소방대도 출동하죠. 그쪽 동료·선배 센터장의 도움을 받았어요. 화재 진압이 끝난 뒤 돌아와서는 직원들과 '이번에 큰일 날 뻔했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다'는 등의 얘기를 나눴어요. 소위 '복기(復棋)'를 하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많이 배웠어요."

―화재 출동 현장에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화재 진압이 대여섯 시간 길어질 때죠. 현장에서 사고가 나는 것은 교대 인력이 없을 때죠. 소방관은 쉬고 들어가고 해야 하는데, 몇 시간 계속 불 속에 있다 보면 판단이 흐려지게 돼요."

―가장 기억나는 사건은요?

"새벽 6시쯤 가정집 화재 신고가 들어왔어요. 출동했을 때 이미 세 살과 다섯 살 아이가 불에 타 숨져 있었어요. 그런데 집 신발장 안에 조끄만 신발이 있는 거예요. 가슴이 무너져 내렸어요."

―어떤 화재였기에 아이들만?

"부모는 30대 중반이었어요. IMF 시절이라 남편이 일자리를 잃어 전기료를 내지 못해 집에 전기가 끊겼어요. 집에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찾으러 아내가 TV 위에 촛불을 켜두고 나간 거예요. 저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이다 보니까 그 사건은 잊히질 않아요."

―앞서 직원과 얘기해보니, 횡성소방서에 요즘 가장 빈번하게 접수되는 내용이 '말벌집 제거 요청'이라고 하더군요. 또 잠긴 집 현관문을 열어달라는 민원도 들어온다는데.

"생활 민원 전담팀이 있어요. 현관문을 다 열어주는 게 아니라 '집 안에 노인이나 어린애 혼자 있어서 위험하다'고 할 때 열어주죠. 도시에 사는 자녀가 '시골 부모와 연락이 안 된다'고 신고해 와도 안 가볼 수가 없어요. 악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로서는 '위험하다'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 게 소방관의 업무에 속하는가요?

"사람 목숨이 위험하다면 소방관 업무가 돼요. 노인이 혼자 사는데 며칠째 연락이 안 된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위험할 수 있으니 가서 확인해야 해요. 어쩌면 자식의 효도를 우리가 대신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개인적 편의를 위해 소방관을 집사처럼 부려먹는다는 느낌도 드는군요.

"경기도 수원에 사는 한 여성이 '내 동생이 자살할 것 같다. 원주에 있다고 한다'며 신고를 해왔어요. 원주에 연고가 있느냐고 물으니 부모님 산소가 있다고 해요. 직원들이 다 출동해 찾았어요. 그런데 그 동생은 부모 산소 곁에 차를 대놓고 잔뜩 취해 자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여성에게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동생은 차 안에 있더라'고 연락해줬어요. 그러자 '예, 알았어요' 하고는 끊어요. 우리가 그렇게 고생했는데 '감사합니다' 말 한마디 없이요."

―소방관은 보람을 느끼기가 쉽지 않겠는데요.

"우리 관할 지역에 사는 팔십 노모가 신부전증을 앓는 삼십대 아들의 투석을 위해 일주일에 두 차례 병원을 오간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투석하는 날마다 구급차로 데려다 줬어요. 아들은 1년 뒤 숨졌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복숭아 한 상자를 갖고 '아들은 죽었지만 정말 고마웠다'며 파출소를 찾아왔어요."

―응급 상황이 아닌데 구급차를 그렇게 사용하는 게 옳을까요?

"원칙은 아니지요. 하지만 국민의 아픔을 함께하는 소방관이 돼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소방관은 불구덩이로 뛰어들 수도 있는 거지요. 아니면 자기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할 수가 없죠. 1천억원을 준다고 자기 목숨을 내놓지는 않잖아요."

―소방관은 장비를 갖추고 들어가는 거지, 죽으려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아니지만,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사명감이 없으면 그런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저는 '네, 고객님. 네, 고객님' 하는 판에 박힌 듯한 기업체의 기계음을 싫어해요. 그건 영혼이 없는 거죠. 말만 고객이지 실제 해결해주는 것은 없어요. 저는 강원소방본부 상황실장을 하면서 직원들에게 영혼과 사명감을 갖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라고 했어요."

―여기로 오면서 상상했던 것과는 실물이 너무 달랐어요. 소방관치고는 너무 아담하고 여성스럽군요.

"대신 깡은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37년을 해온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