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上海) 황푸구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안팎을 새로 단장해 4일 재개관(再開館)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자리에 참석해 축사하고 방명록에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겠습니다"라고 썼다. 이날 국가보훈처와 조선일보가 주관한 '한·중 청년 자전거 대장정' 원정대는 상하이 임정 청사가 있는 거리에서 마지막 주행을 펼쳐 재개관의 뜻을 더했다. 원정대는 동북아 평화와 통일 염원을 담고 지난달 3일 임정 마지막 청사가 있던 충칭(重慶)을 출발해 33일 동안 3000㎞를 달리며 중국에 남아있는 임정의 자취를 답사한 뒤, 맨 처음 임시정부가 닻을 올린 상하이에 입성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출발점이다. 임정은 1919년 3·1운동의 민족적 염원과 함께 태어나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27년 동안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임정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민 모두가 나라의 주인임을 분명히 했다. 임정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됐고 임정의 법통(法統)은 대한민국 헌법을 통해 연면히 계승되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이런 임정의 뜻을 되새기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독립·자존·공화의 이념을 밝히는 일이다.

3·1 독립운동의 함성 속에서 탄생한 조선일보는 1920년 창간하면서부터 임정의 독립운동을 국내외에 알렸다. 상하이에서 일본 밀정(密偵)을 잡아내는 맹호단을 조직했다는 소식을 전하거나 노백린 선생을 국무총리로 하는 임정 각료 명단을 실어 신문이 압수되기도 했다. 1932년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왕(日王)을 폭사시키려 했던 의거를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신석우 선생은 임정 출범 당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던 인물이고, 조선일보는 국내 독립운동 조직인 신간회 활동과 한글 보급 운동을 주도했다.

이번에 재단장한 상하이 임정 청사는 1926~1932년 김구 선생이 주석(主席)으로 있던 시절 임정이 사용했던 곳이다.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쾌거(快擧)가 이곳에서 계획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다. 우리 정부가 리모델링 공사 비용 7억원을 대겠다고 했으나 중국 정부가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일제 침략기 한국과 중국이 공동 항전(抗戰)에 나섰듯 임정 청사를 지키는 일에 힘을 모은 것은 두 나라 우의(友誼)를 미래로 이어가는 뜻깊은 전례(前例)가 될 것이다.

임정 애국지사들이 걸었던 길은 가시밭의 연속이었다. 남의 나라 더부살이를 하는 처지에 집세를 못 내 소송을 당하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공터에 중국 채소 상인들이 버리고 간 배추 껍질을 주워다 소금에 절여 먹기도 했다. 임정이 옮겨다녔던 중국 땅을 자전거로 달리며 고난의 현장을 본 원정대의 황인범 대장은 "나라가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자전거 원정대가 거친 충칭~창사~난징 구간은 중국에서도 '화덕'이라 불릴 정도로 무더운 곳이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길을 한 달 넘게 두 다리의 힘으로 달린다는 것은 체력과 인내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다. 그러나 대원들은 "우리는 자전거라도 타고 가지만 선열들은 오직 나라를 되찾겠다는 꿈 하나로 이 길을 숨어다녔을 걸 생각하니 주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평균 나이 스물여섯 젊은이들의 깨달음은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로 계속 전해져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임정의 독립투사들이 상상도 못한 성취를 이뤘다. 그러나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늘까지 선열들이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있다. 한 민족이 둘로 나뉜 채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광복은 미완성이다. 남북한이 통일을 이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 때 진정한 광복은 이뤄진다. 임정 선열들이 '고난의 길'을 '독립의 길'로 바꿨듯 우리 세대는 통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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