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라서 처벌을 면하고 가난해서 감옥에 간다는 설명은 단세포적이다. 답은 훨씬 복잡하다.” 2012년 12월 술에 취해 뉴욕의 밤거리를 떠돌던 노숙자 토니 매런을 한 경찰이 불러 세웠다. 경찰은 그를 ‘불심검문’해 소량의 대마초를 찾아냈다. 뉴욕에서 그 정도 대마초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그걸 공공장소에서 (본인 또는 경찰이) 내보이는 순간 죄가 된다. 노숙자 토니는 경찰이 불러 세웠을 때 이미 범죄자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40일간 수감됐다.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은 법 위에 군림하지만,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은 순식간에 범죄자로 전락한다. 그림은 원서에 실린 삽화. (ⓒMolly Crabappie·열린책들 제공)

기자, 미국판 ‘유전무죄·무전유죄’ 보고서를 쓰다

같은 시기 미 법무부는 대형은행 HSBC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은행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나 북한 같은 테러지원국을 위한 자금 세탁 등 온갖 금융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처벌은 5주일치 수익이나 될까 싶은 벌금이 전부였다. 법무부는 “행위의 심각성과 ‘부수적 결과’를 고려했다”고 밝혔다.

두 사건을 취재한 미국의 기자이자 정치평론가 맷 타이비는 자문했다. 도대체 미국 사법제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의문을 풀기 위해 취재수첩을 열었다. 수첩이 쌓여 두툼한 책 한 권으로 나왔다. 이 책은 ‘미국판(版) 유전무죄·무전유죄 보고서’다. 사기나 다름없는 대출 상품을 팔다가 전 세계적 금융 환란을 불러와도 재판조차 받지 않는 이들과 음료수를 사러 나갔다가 신분증이 없어서 수감되는 사람들이 이 보고서의 주인공이다. 온갖 사례를 통해 결론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탐사 보도의 교과서 같다.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은 법 위에 군림하지만,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은 순식간에 범죄자로 전락한다. 그림은 원서에 실린 삽화. (ⓒMolly Crabappie·열린책들 제공)

감옥은 가난한 약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현상은 통계로 증명된다. 지난 20년간 미국의 폭력범죄는 꾸준히 줄었는데, 수감자 수는 2배 이상 늘었다. 모순을 이해하는 열쇠는 같은 기간 50% 이상 증가한 빈곤율이다. 저자는 감옥이 가난한 약자들로 채워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토니 매런이 당한 불심검문이 이 현상의 중심에 있다. 불심검문은 사소한 불법을 근절해야 범죄 억지 효과가 있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에 근거해 도입된 것이다. 불심검문의 타깃은 주로 토니 같은 사회적 약자다. 그저 행색이 수상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몸 수색을 할 수 있다. 2011년 뉴욕의 불심검문 중 88%가 유색인종이었다. 불심검문은 줄어드는 급여와 예산 속에서 할당된 성과를 올리기 위한 경찰의 자구책이다. 실상은 불필요한 잔챙이까지 잡아들여 바다를 황폐화시키는 저인망식 어업이나 다름없다.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은 법 위에 군림하지만,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은 순식간에 범죄자로 전락한다. 그림은 원서에 실린 삽화. (ⓒMolly Crabappie·열린책들 제공)

수백억 횡령·배임 저지른 재벌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그 그물에는 ‘부수적 결과’라는 큰 구멍이 뚫려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법무부 장관이었던 에릭 홀더가 주창한 ‘부수적 결과’ 이론은 간단히 말해 대기업의 범죄를 처벌할 때는 주가 폭락 등으로 생길 경제적 악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논리다. 수백억원의 횡령과 배임을 저지른 재벌그룹 경영자들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재벌 정찰제’ 판결을 내릴 때 우리 법원도 종종 경제적 악영향이라는 요소를 고려했다고 이유를 댄다. 이 부수적 결과 덕분에 어떤 기업범죄사범도 벌금만 내고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겼다.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은 법 위에 군림하지만,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은 순식간에 범죄자로 전락한다. 그림은 원서에 실린 삽화. (ⓒMolly Crabappie·열린책들 제공)

국가의 무도한 광기는 ‘비밀주의’가 아닌 ‘불공정함’이다

한쪽으로 쏠린 부(富)의 평형추가 이런 불공정을 심화시킨다. 대기업들은 대형 법률회사들의 도움을 받지만, 가난한 이들은 국선변호사도 선임하기 힘들다. 검사들은 자금을 무한정 동원할 수 있는 대기업 수사를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겁 없이 덤볐다가 실패하면 경력에 큰 타격을 입는다. 반면 편의점 절도범, 마약사범 같은 잡범을 잡아들이면 쉽게 실적을 올릴 수 있다. 사법당국은 점점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대기업 수사는 부수적 결과를 고려해 적당한 선에서 끝내고, 10초 만에 유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 사건에 몰두한다. 누군가의 음모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왜곡된’ 시스템이 유전무죄·무전유죄를 낳는다. 대기업 회장들은 어김없이 집행유예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는데 몇 만원의 벌금조차 내지 못해 노역형을 택하는 사람의 숫자는 늘어나는 한국의 모습이, 책을 읽는 내내 어른거린다.

미국의 연방대법관을 지낸 존 포터는 “정의의 본 모습은 공정함”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기나긴 취재수첩을 덮으며 결론 내린다.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디스토피아에서 국가의 무도한 광기는 비밀주의나 검열주의가 아니라 불공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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