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 부자가 르누아르, 고흐, 마티스 등의 걸작 30점을 미술관에 기증하고 자기 집에는 똑같은 그림 복제품을 걸었다. 최근 미국 방송에 보도된 얘기다. 미국 세무법인 H&R 블록 공동 창업자인 헨리 블로흐. 그는 아내와 함께 수십년 그림을 사모아 거실·침실·식당에 걸어놓고 즐겼다. 그리곤 2013년 아내가 죽자 캔자스의 넬슨-앳킨스 미술관에 기증했다. 정작 기증하고 보니 허전함을 견딜 수 없었다. 블로흐는 싼값으로 복제품을 만들고 이를 똑같은 액자에 넣어 걸었다. 그는 "기막히게 좋다"고 했다. 그는 전에도 미술관 확장 비용 1200만달러를 기부한 일이 있다.

▶기부는 아름답다. 그러나 남이 할 땐 박수 칠 수 있어도 내가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부산 공간화랑 대표 신옥진씨는 지난 17년 동안 미술품 800여점을 미술관들에 기증했다. 그도 처음 기증할 땐 마음이 흔들리더라고 했다. 밤새 고심해 결정했지만 날이 밝자 슬그머니 생각이 달라졌다. 노후(老後)도 걱정됐다. 그림을 보내놓고 나중에 보니 아끼던 작품들은 빼놓고 있었다.

▶서울대 미술관은 신씨가 마지막 기증한 작품 64점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있다. 그의 창고에는 아직 몇 점이 남아 있지만 이젠 별게 없다고 한다. 신씨는 "내가 갖고 싶은 걸 줘야 진짜 기증"이라고 했다. 시장에서 김밥 장사, 반찬 장사 하던 할머니들이 평생 모은 돈을 아낌없이 내놓을 때 뭉클함은 더하다.

▶'조건 있는 기부'가 아름다울 때도 있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 도서관은 특이하게도 지하에 있다. 아주 오래전 이 일대 땅을 옥수수 재배 시험장으로 기부한 사람이 한 가지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다. "근처에 옥수수 재배 시험에 영향을 주는 어떤 건물도 세우지 말 것." 건물로 인해 바람이 막히거나 그림자가 생기면 옥수수 생장 환경이 달라진다. 대학은 1950년대 도서관을 지으며 기증자의 뜻을 따랐다. 그가 내놓은 조건 덕에 일리노이 대학은 자랑스러운 도서관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옥수수 시험장을 함께 갖고 있다(이윤기 '에세이 온 아메리카').

▶대기업·재력가들이 기부 형식으로 서울대에 지어준 건물이 66개다. 이 가운데 일부 공간이 기부자에게 다시 장기 무상 임대돼 카페·패스트푸드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처음부터 이런 조건을 달았다면 부적절한 조건이다. 기부한 쪽 생각이 나중에 슬그머니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여튼 '이상한 기부'다. 다른 대학은 어떤지 궁금하다. 기부가 뭉클한 건 역시 누구에게나 소중한 걸 기꺼이 내놓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