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건축업자인 의뢰인의 사건을 맡았던 김모 변호사는 감정(鑑定) 결과 때문에 큰 봉변을 당했다. 건축주 지시로 추가 공사를 했는데 '계약한 것 이상으로 일을 했고, 비용도 추가로 들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감정을 신청했다. 김 변호사는 재판장이 선정한 감정인에게 2300만원을 감정료로 줬다. 그런데 세 차례 감정 중 감정인이 현장에 나온 것은 한 번뿐이었고 나머지는 감정인의 옛 직장 동료라는 사람이 나왔다. 알고 보니 감정인은 사무실도 없이 집이나 커피숍 등에서 일하고 있었다.

2300만원이나 들였지만 감정서의 핵심 부분은 달랑 두 장, '추가로 들어간 공사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감정 결과가 나오자 상대방은 의뢰인을 '받을 돈도 없으면서 소송을 냈다'며 소송 사기로 고소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죄가 났지만 공사비 소송은 감정 결과 때문에 1심에서 패소했고 지금은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재판 결과도 바꾸는 '감정의 힘'

건축·의료 등 전문 분야는 '감정 재판'이라고 할 정도로 감정의 비중이 크다. 감정은 법관이 전문 분야 지식을 모두 갖출 수 없기 때문에 해당 분야 전문가로 하여금 하자 보수 비용이 얼마인지, 진료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등 재판에 필요한 사항을 가리게 하는 절차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에서만 7869건의 감정이 이뤄졌다.

부동산 규모가 큰 경우 감정 결과에 따라 수십억~수백억원이 왔다갔다하고 감정 때문에 재판 결과가 바뀌는 일도 많다. 법적으로는 판사가 감정 결과를 그대로 따라야 할 의무는 없지만 감정인에게 전문 지식을 의존하는 판사로서는 다른 판단을 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판사들이 90% 이상 감정 결과에 따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전문성 부족·편파 감정 개선해야

이처럼 감정이 중요하지만 감정인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건설 전문 최모 변호사는 "최근 다툼이 많은 방화문, 스프링클러, 난방 배관 등 전문 분야에 대한 감정 능력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건축·토목·전기·설비 분야 자격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 등 감정인 관리가 세분화되지 않은 점도 문제다. 감정인은 법관 못지않게 공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정모 변호사는 "감정인이 우리 쪽엔 현장 조사 기일을 알려주지 않아 낭패를 봤다"며 "어느 한쪽 편만 들면서 그쪽에 유리한 자료만 적극 수집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감정인이 다른 사람에게 '감정 하도급'을 줄 경우엔 더욱 문제가 크다. 한쪽 당사자와 몰래 접촉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동인 이범상 변호사는 "하도급을 받은 사람들은 당사자와 개인적으로 접촉하고도 문제의식이 없고 법원도 이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법원의 감정인 관리는 재판부가 감정이 끝난 후 감정인을 평가해 연말에 부적격자를 명단에서 제외하는 사후 관리에 머물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2014년 감정인 1657명 중 1106명이 재지정됐고, 탈락자는 551명이나 됐다.

이범상 변호사는 "감정이 진행 중이라도 한쪽에서 문제를 제기해 문제점이 확인되면 재판부가 즉각 해당 감정인을 배제하고 다시 선정할 수 있게 예규를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감정(鑑定)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법관의 판단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특정 사안에 대한 구체적 사실 판단을 하고 법원에 보고하는 증거 조사법. 건설, 의료, 소프트웨어 등 전문 분야에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