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71) 전 총리의 ‘9억원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이 대법원에서 유죄로 최종 결론이 났다. 그가 2010년 7월 21일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지 꼬박 5년 1개월 만이다. 그 사이 한 전 총리는 19대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돼 국회의원 임기 4년 중 3년 3개월을 채웠다. 결과적으로 법원의 늑장처리로 한 전 총리의 임기를 다 채워준 셈이 됐다.

한 전 총리의 9억원 사건이 기소 이후 5년이 넘어서야 최종 결론이 나게 된 데는 항소심인 서울고법이 한 전 총리의 또 다른 ‘5만 달러 뇌물’ 사건의 대법원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이유로 공판을 1년 넘게 무기한 연기한 게 첫째 이유다. 1심에서 항소심 선고까지 3년 넘게 걸렸다. 여기에 대법원까지 “사건의 쟁점이 많고,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2년 가까이 선고하지 않은 채 사건을 묵혔다.

새정치민주연합 한명숙 의원(왼쪽).

이 사건은 당초 대법관 4명이 소속된 소부인 대법원 2부에 배당됐다. 이후 상고된 지 20개월이 넘은 지난 6월 대법관들 사이에서 유무죄 의견이 엇갈린다는 이유로 13명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사건을 넘겼다. 결국 대법관들의 다수결로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법리(法理) 복잡하거나 쟁점이 많은 사건은 대법원 상고심 재판도 오래 걸릴 수 있다. 하지만 뇌물이나 불법정치자금 수사 사건의 경우 대부분 금품을 받았은지가 핵심이 되는 사실 인정 문제여서 쟁점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게 보통이다. 한 전 총리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법원은 사건의 사실 관계를 다투고, 관련된 법률 규정 등을 살피는 사실심(事實審)이 아니라 하급심이 법률 적용을 제대로 해 유무죄를 옳게 판단했는지만 따지는 법률심(法律審)이어서 시간을 끌 이유도 없었다는 게 법조계 의견이다.

이런 지적을 의식한 듯 대법원은 이날 선고 직후 이례적으로 재판 지연에 대해 적극 해명까지 하고 나섰다. 대법원은 “공판기록만 45책(보통 500쪽이 1책), 증거기록을 합하면 70책을 상회한다”고 밝혔다. 또 대법원은 “사실관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사안이어서 연구관이 기록을 빠짐없이 검토하고 법리를 분석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소요됐다”며 “소부에서도 의견이 나뉘었고 전원합의체에서도 의견이 나뉘어 부족한 부분에 관해 수차 추가보고를 했다”고 덧붙였다. “사건 쟁점이 많고, 검토할 기록이 많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한 셈이다.

“정치인 재판은 신속히 처리하겠다”고 공언해왔던 것과 달리 대법원이 유독 한 전 총리 사건만 2년 가까이 끌고온 데 대해 법원 내부에서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대법원이 강하게 밀어부치는 상고법원 설치와 맞물려 “사법부가 정치권 눈치를 보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상고법원 관련 법안은 현재 국회에 게류 중인 상태지만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이 야당 유력 정치인 사건 선고를 미루면서 스스로 재판에 대한 신뢰를 깨뜨렸다”며 “결과적으로 상고법원 추진과 맞물리면서 불필요한 오해까지 자초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