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협녀'의 포스터. 영화에서 이병헌은 식상하고, 전도연은 노쇠하며, 김고은은 익지 않았다.

하도 이병헌이 욕을 먹길래, 그가 나오는 영화 ‘협녀’를 보았다. 1000만명을 향해 달려가는 ‘베테랑’ ‘암살’ 같은 영화는 주말 당일에 표를 살 수 없었지만, 이 영화는 표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같은 날, 독립영화 ‘성실한 나라의 엘리스’도 보았는데 이 영화 제작비는 2억원, ‘협녀’의 50분의 1이다. 이 영화가 별 세개반쯤이라면, ‘협녀’는 별 두개를 주기도 아까웠다. 다른 이들 생각도 비슷했는지, 이 영화의 누적 관객은 40만명이 안된다. 100억짜리 영화, 망했다고 봐야 한다. 나이어린 미인 탤런트와 결혼해 그 부인이 임신한 사이, 다른 가수에게 접근해 “로맨틱하게” 추근됐던 그의 과오, 거기에 투자배급사가 요즘 말 많은 롯데 계열사인 롯데엔터테인먼트라는 점이 이 영화의 ‘폭망’을 예견케 했다.

역시 ‘이병헌 원죄론’이 맞았던 것일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영화의 흥행에 관한한, 예상은 맞았지만 ‘원인’ 진단은 틀렸다. 영화 관객 중에 ‘배급사’를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영화만 괜찮았다면, ‘이병헌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아” 하면서 관객은 입소문 냈을 것이다.

'한국 무협'을 표방한 이 영화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첫째, 만듦새가 엉성하다. 힘을 준 장면마다 다른 영화가 떠오르는데, 어느 것 하나 '원본'을 뛰어넘는 게 없다. 영화의 첫 대목은 비현실적으로 넓은 해바라기 밭을 소녀 무사가 훨훨 날아다니는 장면이다. '와호장룡'에서 장쯔이가 대나무 숲을 넘나드는 장면을 연상케한다. 눈밭에서 이병헌과 김고은, 전도연 세 주인공이 겨루는 마지막 장면은 '킬빌'의 우마 서먼과 루시리우의 대결을 연상시키지만, 70년대 한국 드라마에서나 보던 '플라스틱 눈발'이 환상을 깨버린다. 무협의 주인공이 훨훨 나는 장면의 컴퓨터 그래픽은 속도감이나 중량감이 조악하기 그지없어 '똘이장군' 수준에나 어울린다.
둘째, 스토리다. '무협(武俠)'에 관한 중국 지식인들의 정의는 꽤 심오하다. 사마천은 '사기' 에서 그는 의(義)란 정도를 추구하는 것, 협이란 약자를 돕고 과부를 보살피고 어린아이를 돌봐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협(俠)은 클 대(大)에 사람 인(人) 세 개가 합쳐진 모양이다. 또 '유협(遊俠)'은 '그 행동이 정의에 벗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말에 신의가 있고 행동에 해냄이 있다. 한번 승낙한 일은 성의를 다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사람의 곤경에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공덕을 내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했다. 무(武)는 그 협의 정신을 구현하는 기술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협'의 정신 자체다. 고려 말, 민중봉기를 꿈꾸던 세 무인 유백(이병헌)과 월소(전도연), 풍천(배수빈)은 목숨을 같이 하기로 한 동지. 그러나 유백은 권력에 눈이 멀어, 월소는 유백에 대한 사랑으로 풍천을 함께 배반한다. 그럼에도 월소는 풍천의 딸 홍이(김고은)를 거두어 키우고, 무술을 가르치고, 마침내 "나와 유백이 너의 아비를 죽였으니, 우리 둘에게 복수를 하라"고 한다. 이후 드러나는 진실은 조금 더 놀랍다. 월소는 홍이가 죽자 자신이 낳은 딸을 '홍이'라 부르며 그에게 무술을 가르쳐온 것이다. 한번 맹세한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 그것이 '협'이다.

영화는 시대와 조응한다. 인류역사상 지금처럼 개인의 감정이 소중하게 다뤄진 적은 없었다. '웰빙 시대'란 그저 잘 먹고, 건강을 지키자는 개념이 아니라, 어떤 대의명분도 '개인'에 앞서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선택과 취향이 의미를 압도하는 세계다. 이병헌 신민아가 주연을 맡았던 '달콤한 인생'이나 김혜수 김고은 주연의 '차이나타운'에서 자기 목숨이 위험할 것을 감수하면서도, '타자의 세계에 대한 끌림'을 거부하지 못했다. 개인의 발견, 정서의 지배력이다.
이런 세상에 '타협없는 협의 정신'을 말하는 영화는 관객과 불화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디테일이 떨어지니 영 '감흥'이 오지 않는 것이다. 이병헌은 꽤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영화는 이병헌이 박수받을 기회를 앗아감으로써, 그 자체로 '협'을 구현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