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시계·古書·레코드판… 추억이 숨쉬는 벼룩시장

"아이고 언니, 2000원에 뭘 더 바라! 한번 잘 입고 나갔다 오면 되는 거지. 거기 잘 찾아봐. 보물이야 찾는 게 임자 아닌가?"

지난 9일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동묘앞역 동묘 벼룩시장. 지하철 역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사람 파도'에 밀려 걷는 건지, 떠밀려 가는지 모르게 가다 보니 곳곳에 '봉분' 같은 옷더미들이 기다리고 있다. 보물 142호 동묘(東廟) 주변 공터에 자리 잡은 노점 상인들은 사람 크기만 한 봉투에서 옷을 땅바닥에 쏟아붓더니 의자에 올라 손뼉을 치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골라 골라!" "이천원 이천원!" 워낙 손님이 많아 노점 주인들이 '사든지 말든지'라는 자세로 심드렁하게 대한다는 '사전 정보'와는 반대였다. 여기서 더 깎아보겠다고 흥정하는 소리도 들린다.

월척을 낚았을 때 손맛이란 이런 것일까. 수많은 물건 속에서 원했던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쾌감이란! ‘그의 이름을 불러줬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처럼 동묘시장의 물건도 이렇게 새 생명을 얻는다. 동묘시장을 찾은 한 커플이 겨울맞이 제품을 ‘득템’하고는 환하게 웃고 있다.

봉투 속에서 구겨진 종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옷들이 바닥으로 '해방'되는 순간 아줌마 아저씨들이 공중에서부터 재빨리 낚아챈다. 허리를 굽히는 것은 기본, 무릎 정도는 꿇어줘야 '2000원 보물'을 찾는 자세다. 손에 잡힌다고 다 살 만한 것도 아니라 색상·사이즈·스타일 한번 대충 '스캔'하고 또다시 '굴착'에 들어간다. 이쯤 되면 '인간 두더지'로 빙의한 기분이다.

"잡았다!" 남들이 들으면 어디 첩첩산중에서 백 년 묵은 산삼이라도 발견한 줄 알았을 것이다. '옷 무덤'에 거의 몸을 파묻을 정도로 깊숙이 헤치고 들어가 티셔츠와 스커트를 건졌다. 제품 라벨과 소재, 단추, 지퍼 등을 꼼꼼히 살펴보니 거의 손도 안 댄 새 제품이다. 이게 몇 시간 만에 찾은 것인가! 인터넷에서 '동묘 벼룩시장''동묘 구제시장'을 검색하면 '동묘 득템'이라는 용어가 연관검색어로 나올 정도로 좋은 물건을 값싸게 구매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쉬운 쇼핑'이 될 줄 알았다. 오전 시장에 도착해 동묘앞역 4번 출구 앞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스타디움 재킷'(일종의 야구 점퍼) 스타일의 리바이스 구제 가죽점퍼, 그것도 100% 양가죽 점퍼를 단돈 5000원에 '득템'했기에(좀 더 깎아보려 했지만 '개시'라는 말에 도의상 단념했다) 더더욱 자신감이 고취된 상태였다.

동묘시장에서 구식 전화기 등 빈티지 물건을 파는 매장 모습.

하지만 생각보다 노점 범위가 넓어 발품 좀 팔아야 했다. 백화점은 백 바퀴 돌아야 한다고 해서 백화점이라더니, 구제 시장은 구백 번은 돌아야 하나 보다. 하기야 '벼룩시장'이라는 말뜻이 벼룩이 들끓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을 판다는 뜻이라 하니 값싸게 사는 만큼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옷장에 처박아 두면 그게 옷인가? 제대로 입어줘야 옷이지. 그런 것들이 이곳에 와서 제 주인을 만나면 생명을 얻는 것이지. 죽어가는 옷에 심폐소생술 해주는 거야." 이곳에서 15년 넘게 노점을 했다는 한 상인이 말한다.

동묘 시장은 1980년대부터 형성됐다. 이후 청계천 개발로 인근 황학동 벼룩시장 상인들이 동묘로 넘어오면서 구제 의류부터 외제 과자, 시계, 고서(古書), 레코드판 등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는' 시장이 됐다. '6090의 홍대'라 불리며, 근처 종로 등지에서 온 어르신들의 '아지트'로 사랑받았다. 최근엔 연령대가 대폭 확대됐다. 10대 학생도 종종 눈에 띈다. 지난해 가수 지 드래곤의 뮤직 비디오에 등장하고, 최근 각종 TV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다. 주말에는 평균 10만명이 찾는다. 낡고 떨어진 간판을 그대로 안은 거리 풍경에 골동품이 어우러져서인지 골목 자체에서 추억을 되새기려는 이들도 있다. 물건뿐만 아니라 동네가 주는 '빈티지' 느낌에 '출사족'이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잘나가던 '6070 언니 오빠'들의 '핫플레이스'였던 곳이어서인지 그 당시 땟자국이 가득한 '여관' '여인숙'이 골목 어귀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가 우리가 '인숙이네'라고 불렀던 곳이야. 예전 12시 통금령(밤 12시 이후 통행금지) 있을 때 친구랑 한잔씩 꺾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거든. '어이쿠야!' 하고 당도하는 곳이 여기였어. 친구들한테는 '인숙이네서 자고 왔다'고 큰소리쳤지 뭐. 머리 희끗희끗해져 이렇게 다시 와 구경하며 시간 보낼지 또 알았나. 허허"

동묘 앞 맛집

동묘(東廟) 앞 음식값은 198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 거리 포장마차에서는 부침개 1500원, 토스트 1000원에 팔았다. 노점상뿐 아니라 식당도 마찬가지다. 구수한 멸치 국물에 뜨끈하게 말아주는 국수 한 그릇이 3000원,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빈대떡은 6000원이다. 그렇다고 양이 적지도 않아서 1만원이면 배불리 먹고도 집에 돌아갈 버스나 지하철 요금은 남는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정통 인도·네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네팔 거리’도 있다. 동묘 주변 식당을 돌며 직접 시식해 찾아낸 맛집을 소개한다.

[네팔거리] 현지 커리가 생각나면 이 거리로 오세요

1호선 동묘앞역에서 동대문역으로 이어지는 큰길 북쪽 편으로 200~300m 거리에 인도·네팔 음식점과 식료품점 10여 개가 밀집해 있다. 큰길과 이어진 골목에 들어서자 벽에 ‘Nepathya Live Concert in Korea’라고 인쇄된, 네팔에서는 꽤 유명한 듯한 가수의 공연 포스터가 ‘제8회 이주민영화제’ 포스터와 함께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 ‘마야마트(Maya Mart)’가 있다. 기(ghee·인도·네팔 요리에 쓰이는 정제 버터)나 향신료 따위 네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재료와 한국산 담요, 스웨터 등 고향 가족에게 보낼 물건을 팔았다.

이곳엔 봉제공장이 많았다. 여기에 네팔인들이 일하러 왔다. 봉제산업이 쇠락하자 네팔인들도 흩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주말이면 많은 네팔인이 고향 음식을 먹으며 향수를 달래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몰려든다. 식당은 네팔인이 운영하지만 대부분 인도 음식을 표방한다. 국내에서 인도 음식이 더 널리 알려진 데다, 인도와 네팔은 음식이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다.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본토에 가까운 맛을 낸다. ‘너무 오리지널한’ 맛과 분위기가 평균적인 한국인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나마스테’를 추천한다. 현지의 맛과 한국인의 취향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

메뉴판에는 ‘탄두르-숯불을 밑바닥에 놓는 원통형의 인도 토제 화덕’ ‘티카-고기나 채소를 양념에 절여두었다가 익힌 요리’ 등 요리법과 식재료 설명이 자세하다. 팔락 파니르, 시푸드 커리 등이 8000~1만2000원으로 근방의 다른 곳보단 약간 비싸지만 그래도 서울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싼 편이다. 나마스테 (02)2232-2286, 에베레스트 (02)766-8850, 야무나 (02)765-7827, 뿌자 (02)744-2199, 히말라얀 (02)3672-1566

[멸치와 국수 이야기] 3000원에 구수한 멸치국수 ‘호로록’

주말에만 문 연다. 대문 안쪽으로 커다란 들통 네댓 개가 놓여 있고, 그 뒤에 선 여주인이 뜨끈한 멸치 국물에 소면을 말아 내느라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바쁘다. 멸치국수·비빔국수 3000원. 이렇게 싼데 양이 무지 많다. 멸치 국물이 매우 훌륭하다. 멸치 비린내는 완벽하게 제거하면서 구수한 맛은 고스란히 살렸다. 저렴한 가격의 비밀은 주인 부부 둘이 운영하며 인건비를 절약하는 데 있는 듯하다. 대신 친절은 기대하면 안 된다. 국수 ‘얻어먹는’ 방법과 순서를 곳곳에 붙여 놓았다. ‘1)선불 3000원. 2)쟁반에 김치, 젓가락 놓기. 3)줄을 서시오. 4)받으시고 가서 드시면 됩니다. 5)빈 그릇은 정수기 옆 선반에 반납해 주세요.’ 전화번호도 없고, 가게 이름을 인터넷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굳이 찾겠다면 주소 ‘지봉로4길 43’으로 하시라.

[고바우] ‘착한’ 가격에 맛보는 ‘착한’ 마블링

한우 꽃등심·제비추리·토시살·차돌박이가 2만5000원, 육회 2만2000원, 갈비살 1만1000원(200g 기준)이라는 ‘착한’ 가격을 보고 품질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가 깜짝 놀랐다. 제대로 된 불판이 아닌 알루미늄 포일로 덮은 철판과 허름한 실내 덕분이라고 하기엔 마블링이 너무나도 훌륭하다. 소고기도 좋지만 돼지고기가 압권이다. 국내산 삼겹살 1만1000원, 갈매기살·항정살 1만2000원인데, 비계에서 누린내가 나지 않지 않는 걸 보면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거나 최소한만을 사용한 좋은 돼지에서 나온 듯하다. 절반인 100g씩도 판다니 더욱 기특하다. (02)2232-8803

[할아버지 손칼국수] 직접 밀어낸 면발… ‘쫄깃쫄깃’ 이 맛에 간다

멸치 국물의 시원함과 구수함이 앞서 소개한 집과 쌍벽을 이룬다. 가격도, 푸짐한 양도 공통점이다. 다르다면 소면 대신 칼국수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선호하는 면발에 따라 두 집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겠다. 국수가 아주 매끄럽다. ‘호로록’ 빨아들이면 입술을 매끄럽게 훑는다. 손으로 민 덕분에 어떤 곳은 얇아서 하들하들하고, 어떤 부분은 두툼해 수제비처럼 씹는 맛이 있다.

칼국수 3000원, 곱빼기 3500원. 하라는 것도, 하지 말란 것도 많은 식당이다. 식탁에 두 가지 양념(다대기)이 있는데 뚜껑에 ‘진짜 얼큰함 조금만’ ‘무척 매우니 조금만 넣으세요’라고 적혀 있다. 벽에는 이런 안내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물은 셀프입니다.’ ‘우리 가게가 선물로 바뀌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인원수대로 칼국수를 주문해주세요 가격이 저렴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술 반입금지.’ ‘가게 물건은 가져가지 맙시다 카메라가 분명 있는데 무슨 배짱과 얼굴로 가져가십니까 손님.’ 별의별 손님이 다 오나 보다. 010-6354-8999

[순희네 빈대떡] 바삭바삭 빈대떡! 광장시장보다 나은데?

광장시장 명물 순희네와 같은 집이다. 광장시장에서 파는 부침개를 여기서 준비해간다고 한다. 빈대떡은 오히려 여기가 낫다. 광장시장 순희네는 기름을 너무 많이 둘러서 전이 아니라 튀김 같은데, 여기는 그 정도는 아니다. 광장시장만큼 손님이 많지 않고, 그만큼 미리 부쳐 놓지 않아 훨씬 신선하다. 하나만 주문해 여럿이 나눠 먹거나, 혼자서 테이블을 차지해도 상관없는 분위기다. 해물녹두빈대떡(1만원), 고기녹두빈대떡(7000원), 녹두빈대떡(6000원), 해물파전(1만원) 등 전 10여 가지가 있다. 골뱅이무침(1만2000원), 오뎅탕(5000원) 따위도 있다. (02)2238-1425

[곱창골목] 곱창 맛집 20곳, 다 모여있다

동묘 벼룩시장에서 영도교를 지나 청계천을 건너면 곱창집 20여 곳이 양옆으로 늘어선 길이 나온다. 돼지 곱창과 막창을 저렴하게 낸다. 영미네 곱창(02-2253-3341·6331)이 손님이 가장 많아 보여 들어갔다. 막창을 소금과 후추로만 간해 철판에 구운 ‘구이곱창’(1만1000원)과 각종 채소를 넣고 매콤하게 볶은 ‘야채곱창’(1만1000원)이 있다. 구이곱창을 맛보고 깜짝 놀랐다. 막창은 구린내 나기 쉬운데, 진한 양념 없이 소금과 후추로 맛을 냈을 뿐인데 불유쾌한 냄새가 없었다. 겉은 잘 튀긴 치킨처럼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쫄깃했다. 순대와 곱창, 채소를 매콤하게 볶은 ‘순대곱창’(1만1000원)은 더 푸짐하다. 오돌뼈(1만원), 뼈없는닭발(1만원), 오징어볶음(1만원) 등도 있다.

[손가네 닭한마리] 동대문보다 통통한 닭… 살은 더 부드럽네

동대문 닭한마리 골목은 요즘 일본·중국 관광객까지 몰려 정신이 없다. 동묘에서 약간 떨어진 골목에 있는 이 식당은 동대문보단 조용하다. 닭을 국물에 익혀 먹은 다음 국수를 끓여서 식사하는 방식은 동대문과 같다. 희석한 간장에 취향대로 겨자와 다진 고추를 섞어 소스를 만들어 찍어 먹고, 시큼한 물김치가 딸려 나오는 것도 같다. 사용하는 닭은 동대문보다 훨씬 크다. 주인 말에 따르면 1㎏짜리 닭을 사용한다는데, 덜 자란 닭보다 살이 덜 퍽퍽하다. 닭한마리 2만원, 국수(사리) 2000원. (02)2234-9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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