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세상과 단절된 군대 생활은 섬과도 같다. 그런데 복무지가 진짜 섬이라면, 게다가 북한을 지척에 둔 접적(接敵) 지역의 섬이라면, 군인들이 느낄 외로움과 긴장감은 더 크리라. 인천에서 뱃길로 122㎞ 떨어진 최전방 섬 연평도에 주둔한 부대인 해병대 연평부대가 딱 그런 곳이다. 북한에서 수시로 포격을 해대 늘 경계 태세다. 연평해전 때는 부상자 후송 등 후방 지원을 맡기도 했다.

이 부대에 최근 특별한 도서관이 들어섰다. 병영 시설이 현대화되면서 부대 내 쓸모없어진 생활관을 도서관으로 리모델링한 '연평도서관'이다. 군대 느낌 걷어낸 이름처럼, 뻔한 개조가 아니었다. 이례적으로 전문 건축가가 참여해 군인들과 디자인 워크숍도 하고, 가구도 직접 만들어 1년 만에 완공했다. 여전히 문화 사각지대인 군대에 '건축'이 들어간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방부가 진행한 '문화로 행복한 공간 만들기' 사업으로 시행된 이 프로젝트엔 건축가 정이삭(35·에이코랩 대표·사진)씨가 참여했다. 철원 선전마을 예술가 창작소, 서울 마장동 주민센터 재계획 등에 참여한 젊은 건축가다.

"섬에서 군 생활을 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고립이지요. 마치 세상에서 뚝 떨어져 버려졌다는 느낌. 그 고독감이 어깨를 짓눌러요. 그래도 책 읽는 순간만큼은 갇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만난 정씨는 "최북단 섬에서 군 생활 하는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군 생활에서 책이 가진 의미를 알기에, 단순한 프로젝트 이상의 애착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해병대 시설 장교로 백령도에서 군 생활을 했다.

상의하달이 생명과도 같은 군 조직이지만, 설계에서만큼은 쌍방향 소통을 시도했다. 건축가가 일방적으로 디자인을 만든 게 아니라 70여명의 장병을 일일이 만났다. 워크숍을 열어 장병들이 자신이 꿈꾸는 도서관을 그리기도 했고, 생활실에서 과자 하나 두고 디자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군인들이 그린 도서관엔 하나같이 '개인적 공간'이 그려져 있었다. 해먹을 그린 장병도 여럿이었다.

"군대에선 선임이든 후임이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눈치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 군대 다녀온 남자라면 다 알 겁니다(웃음)." '육지 느낌 물씬 나는 인테리어를 해달라' '도서관에서만큼은 국방색을 쓰지 말아달라' '도서관에 부대장님 사진은 붙이지 말아달라'…. 웃지 못할 요구도 이어졌다.

(왼쪽 사진)건축가 정이삭이 리모델링한 연평부대 내‘연평도서관’에서 군인들이 책을 읽고 있다. 노출 천장 등으로 빈티지 북 카페 느낌을 살려 군대의 딱딱한 분위기를 줄였다. (오른쪽 사진)연평도서관 외부 모습.

건축가는 이런 소소한 요구를 디자인에 반영했다. 군대 오기 전 이들이 익숙했을 '육지'의 빈티지 카페 분위기를 내기 위해 내무반 8개로 구성됐던 2층짜리 옛 생활관의 벽과 천장을 뚫고 노출 천장을 만들었다. 답답하게 벽을 두르는 대신 합판과 구조용 목재로 높이와 모양이 다른 책장도 배치했다. 책장에 책을 꽂으면 자연히 공간이 분리되고 타인의 시선도 슬쩍 피할 수 있다.

콘텐츠도 중요했다. 홍대 앞에서 동네 서점 바람을 일으킨 땡스북스 이기섭 대표가 직접 20대 남자들이 좋아하는 책으로 '북 큐레이션'(책을 독서자의 취향에 맞게 선별하는 것)을 했다. 연평부대 정훈과장 노경민 대위는 "북 카페 같은 도서관이 들어서니 책에 흥미가 없던 대원들도 관심을 갖게 됐다"며 "특히 요즘처럼 북한 도발 때문에 긴장감이 돌 땐 전방 부대 대원들의 정신적 피로가 더 큰데 이 도서관이 작지만 심리적 안정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