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덕화 인사드리겠습니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8월 셋째주우~. 어우~ 좋아! 자, 오늘, 문을 열어줄 가수, 어우우~~ 좋아! 조, 용, 필! 부우탁~~ 해요!”

드라마 ‘사랑과 야망’(1986, 극본 김수현)에서 거친 듯 힘이 넘치는 연기로 ‘방송가의 야생마’로 각광받던 이덕화는 사망진단서까지 받았던 교통사고를 딛고 재기해 ‘600만불의 사나이’로 불리던 시대의 쾌남이었다. 야릇한 미소를 짓는 미녀를 태우고 닫혀버린 엘리베이터 문을 안타깝게 내리치던 속옷 CF로 광고계를 장악한 ‘CF의 제왕’이기도 했다. 그가 17년 만에 재공연하는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이하 ‘불효자’)로 다시 무대에 선다. 오는 27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공연하는 ‘불효자’는 1998년 IMF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던 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3000석을 전회 매진시키며 9만 관중을 모았던 장안의 화제작이었다.

연극, 드라마, 영화, 뮤지컬, 버라이어티 쇼, 라디오, 악극, 마당놀이. 하나만 해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았던 젊은 날의 이덕화는 할 수 있는 모든 장르에 도전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하나만 했으면 박수 소리가 더 컸으려나.” 지난 10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 지하 연습실에서 43년차 배우 이덕화는 그 어떤 후회도 날려버릴 듯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김지호 기자)

행상을 하며 자식만 챙기는 어머니, 유명 대학을 나와 부잣집 딸과 정략결혼하며 출세를 향해 내달리는 아들, 그 아들에게 버림받은 고향의 첫사랑이 등장한다. 닳고 닳은 줄거리인데도 매회 대극장이 눈물바다가 됐다. 이후 ‘눈물 젖은 두만강’ ‘눈물의 여왕’ 등 아류작이 이어졌다. 또 한 번 악극 돌풍을 몰고올 태세인 그는 내달부터 방영 예정인 KBS 드라마 ‘장사의 신-객주 2015’에서 상인 조합의 노회한 수장도 맡아 분주히 서울과 안동을 오간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때 악극으로 일어서

“아~ 이 무슨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지난 10일 ‘불효자’ 마무리 연습을 하러 장충체육관 무대에 선 이덕화는 어머니의 무덤으로 설정된 이불 더미 앞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이덕화는 낮게 깔린 음성으로 비장한 외침을 계속했다. “아~ 이게 꿈이란 말이냐, 생시란 말이냐!”

- 1998년 ‘불효자’ 초연 때 흥행에 크게 성공했는데.

“만든 우리도 놀랐을 정도다. 노래 전주만 나와도 우는 할머니가 많았다. 대한민국에 불효자협회 회원이 많나 보다. 지방 공연을 6개월간 총 90회 정도 했다.”

- 어떻게 악극의 주인공을 맡게 됐나.

“1996년 총선에 출마했다가 떨어지고 6~7년간 놀았다. (이덕화는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명시 갑 신한국당 후보로 나가 새정치국민회의 남궁진 후보에게 1400여표 차로 졌다.) 이후 방송과 영화에서 전혀 섭외가 없었다. ‘불효자’를 초연하던 1998년은 아무도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때다.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했다. ‘불효자’가 워낙 잘돼 5년간 1년에 한 편씩 악극에 출연했다. ‘며느리 설움’ ‘아버님 전상서’ ‘모정의 세월’에 이어 ‘심봉사 심 봤다’라는 마당놀이까지 했다. 배우로서 영화 연극 드라마 뮤지컬 쇼 광고 등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봤다.”

- 지금이야 만능 엔터테이너가 뜨지만, 데뷔 때만 해도 ‘한 우물’을 높이 치던 시대인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막급이다. 한 가지 일을 열심히 했으면 박수가 더 커질 수도 있었을 텐데. 데뷔 때만 해도 하나로는 양(量)이 안 차더라.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 그땐 왜 그렇게 욕심이 많이 났는지.”

배우 임예진과 함께 출연한 영화 '진짜 진짜 미안해'의 한 장면
1992년 4월 3일 서울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제 30회 대종상영화제에서 남녀주연상을 받은 이덕화와 장미희가 트로피를 높이 치켜든채 관객들의 갈채에 답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방송계의 야생마'로 불리던 이덕화의 전설기 시절 모습
'방송계의 야생마'로 불리던 이덕화의 전설기 시절 모습
'방송계의 야생마'로 불리던 이덕화의 전설기 시절 모습
드라마 '제5공화국'에 출연했던 이덕화. 당시 가발을 안 쓰고 전두환 전 대통령 역을 연기해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조선일보 DB)
유년시절 이덕화, 악역의 대부였던 아버지 故이예춘과 함께 찍은 사진
배우 이덕화가 2015년 8월 10일 서울 장충동체육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20代때 교통사고, 죽었다고 했는데

이덕화는 1972년(인터넷 포털 프로필에는 1973년이다. 1972년이 맞으니 꼭 바로잡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2학년 때 TBC 방송 공채 13기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다. 데뷔작 ‘하얀 장미’로 인기를 얻으며, 요즘으로 치면 ‘국민 여동생’쯤 되던 임예진과 출연한 영화 ‘진짜 진짜 좋아해’로 단숨에 하이틴 스타로 부상했다.

마이크만 잡으면 저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덕화 인사드립니다’가 나오던 끼를 못 이기던 차에 ‘새별들의 행진’이라는 쇼 프로그램 진행자로 발탁됐다. 1977년 4월이었다. 첫회 대본을 넘겨받던 날, 하늘을 날 듯 오토바이를 몰고 귀가하던 그는 장충단 공원 코너를 돌다 버스와 충돌했다. 버스 아래에 끼여 수십미터를 끌려간 그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할 무렵에는 사망진단서가 준비될 정도로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가 있었다. 5개과 의사들이 53번 수술을 하고 목숨을 건졌다. ‘성(性)불구가 됐다’(이후 결혼해 1남1녀를 뒀다)는 악성 루머에 시달렸던 그는 사고로 지체장애 3급이 됐다.

- 사고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

“죽었다 살아나니 무서운 게 없어졌다. 반대로 ‘될 대로 돼라’는 심정도 공존했다. 절제가 없어져서 자신을 추스르려면 힘이 많이 들어갔다. 어쨌든 덤으로 산 게 40년이다. 세상에 별로 부러운 게 없다.”

- 극단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인생관이 달라지지 않나.

“그때는 하루가 비명으로 시작해서 비명으로 끝났다. 모르핀 없이는 버틸 수 없었다. 장(腸)을 1미터 이상 잘라버리고, 구멍을 뚫어서 주머니를 달아놨다. 밥을 먹으면 변이 엉뚱한 쪽으로 나왔다. 그래도 산다. 어떻게든 산다. 사람은 그렇더라.”

- 연기하는 데 지장은 없나.

“관절을 다쳐서 책상다리가 안 된다. 사극 할 때 왕 역할을 하면 밑에다 방석을 안 보이게 3개쯤 깔고 앉아서 한다. 다리 건강에 좋다고 해서 이 몸으로 축구도 한다. 조용필, 나, 이주일 형님 셋이서 주당 3인방으로 친했는데, 이주일 형님이 축구 하라고 설득해서 넘어갔다. 뛰는 덴 지장없다. 남보다 늦어서 그렇지.”

교통사고의 악몽은 다시 한 번 그를 덮쳤다. 1990년 6월 전북 정주시에서 타고 있던 지프가 버스와 충돌해 갈비뼈 3대가 부러졌다. “그때는 6개월쯤 병원에 있었나.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뭐, 허허.”

대종상 수상 3번, 해외 영화제 첫 수상한 남자 배우

이덕화의 방배동 자택에는 대종상 트로피가 4개 있다. 1989년 제27회 때 ‘추억의 이름으로’, 제30회 때 ‘개벽’(감독 임권택)에서 동학 교주 최시형으로, 제31회 때 ‘살어리랏다’의 각설이로 받은 세 번의 주연상이다. ‘살어리랏다’로 이덕화는 한국 남자 배우로는 최초로 해외 영화제(모스크바 국제영화제) 남우 주연상 수상 기록을 세웠다.

4번째는 부친 이예춘(李藝春, 1919~1977)씨가 1962년 제1회 시상식 때 ‘현해탄은 알고 있다’로 받은 조연상 트로피다. 1960년대 ‘악역의 대부’로 불리던 이예춘은 ‘무덤에서 나온 신랑’(1963) ‘살인마’(1965) ‘목없는 신랑’(1967)’ 등 공포영화로 널리 알려진 성격파 배우였다. 살짝 벗어진 대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호탕하면서 잔인한 웃음소리로 깡패 조직의 보스, 사기꾼, 악덕 사장, 호색한을 실감 나게 소화했다.

이예춘은 청진동에 빌딩 두 채를 살 정도로 부를 일궜으나 모조리 영화 제작에 투자했다 빚더미에 앉았다.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를 앓던 아버지는 아들의 교통사고 소식에 병세가 악화돼 입원했다가 아들 이덕화의 바로 옆 병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1974년 이덕화의 영화 데뷔작 ‘공포의 이중인간’은 이예춘의 유작(遺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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