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총선 공천) 땐 20억원을 준 것으로 아는데 17대에선 왜 5억원만 주냐고 되물었다."

지난 5월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공천헌금' 발언으로 새누리당은 쑥대밭이 됐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았던 홍 지사가 돈으로 공천을 사고팔았다는 관행을 설명한 것이다. 새누리당은 2002년 대선 당시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오명을 남긴 차떼기 정당의 악몽이 재현될까 전전긍긍했다.

공천심사위원이 수억원을 받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건 국회의원의 명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선전의 심판 같은 존재다. 누가 본선인 총선에 출마할지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공천심사위원은 감독 역할만 할 뿐이다. 실제 경기의 규칙을 짜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당 사무총장이다. 사무총장은 공천심사위원을 임명하고 위원회를 구성하는 권한을 가진다. 사무총장이 공천심사위원들을 누구로 지명하는지를 보면 공천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즉 사무총장의 손에 국회의원들의 운명이 달린 셈이다.

◆ 국회의원 주무르는 사무총장…선거 시즌 힘 막강해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왼쪽)가 2005년 6월 15일 국회에서 김무성 사무총장(가운데)과 유승민 비서실장(앞줄 오른쪽)으로부터 보고를 들으며 국회 회의장 쪽으로 가고 있다.

사무총장의 당내 서열은 권한만큼 높지 않다. 당 대표와 원내대표, 최고위원, 정책위의장보다 밑이다. 하지만 대표의 뜻을 반영해 당을 운영하는 만큼 대표와 한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선거 관련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의 주가는 치솟는다.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지금은 당협위원장을 선거로 정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무총장이 당협위원장을 배정했다"고 말했다. 당협위원장은 지역 당원협의회를 이끄는 자리로 주로 해당 지역구 현역 의원이 맡는다. 당협위원장이 공석인 지역구는 차기 총선 출마를 노리는 사람이 공천을 받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경우가 많다.

KBS 2TV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어셈블리'를 보면 사무총장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드라마에선 주인공인 진상필 의원이 집권여당 사무총장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이 나온다. 소신 발언으로 당과 마찰음을 빚는 진 의원이지만, 반년도 채 남지 않는 총선에서 공천을 받기 위해 백기 투항한 것이다. 진 의원은 공천권을 쥔 백 총장 눈에 들기 위해 친청계(백 총장이 리더로 있는 친청와대계)의 행동대장을 자청한다.

드라마에선 또 차기 총선 살생부를 만들어 돌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공천이 본격화됐음을 알려 당 의원들을 긴장하게 하기 위해서다. 일부 의원들을 정리하겠다는 신호탄인 셈이다.

◆ 친이-친박 공천학살 주도…친노 총장 인선에 격분한 비노

지난 2012년 2월 26일 당시 권영세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공천 심사 관련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허구가 아니다. 현실 정치판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당권을 장악한 계파가 공천권을 휘둘러 상대 계파를 정리하는 모습이 반복해 일어난다.

18대 총선 때 당권을 장악했던 친이(친이명박)계가 공천에서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당시 박근혜 의원은 이에 '공천학살'이라며 반발했다. 이때 사무총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측근인 이방호 전 의원이었다. 이 전 의원은 당시 총선기획단장을 겸하며 한나라당의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들은 '친박연대'란 이름으로 선거에 출마해 상당수가 당선되기도 했다.

19대 총선 땐 상황이 역전됐다. 상당수 친이계 의원들이 정리됐다. 사무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권영세 전 주중대사가 맡았었다. 권 전 사무총장은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지시를 받아 총선을 이끌었다. 이후 대표적 친박계인 황우여-서병수 체제가 당을 운영했다.

두 번의 공천학살을 거친 새누리당은 20대 총선을 지휘할 사무총장에 황진하 의원을 앉혔다. 황 의원은 친박계로 분류되지만 계파 색이 옅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무성 당 대표가 비박(비박근혜)계인 점을 고려하면 계파 간 힘의 균형을 맞춘 셈이다.

지난 6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표(오른쪽)와 최재성 사무총장의 모습이다. 이종걸 원내대표와 유승희 최고위원은 최 총장 인선에 반발해 이날 회의에 불참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최근 사무총장직을 폐지했다. 당내 계파 갈등을 부추기는 주요 원인으로 본 것이다. 문재인 당 대표는 친노(친노무현)계로 분류되는 최재성 의원을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비노(비노무현)계 인사인 이종걸 원내대표는 이에 반발해 최고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다. 당권을 잡은 친노계가 이번 공천에서 비노계를 몰아낼 것이라는 우려 탓이다.

문 대표가 비노계를 설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당내 갈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당 혁신위원회는 중재안으로 사무총장을 폐지하는 내용의 혁신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당은 계파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혁신안을 받아들였고, 최 의원은 사무총장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