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은 정현종 시인〈사진〉이 외국 시(詩) 번역 시집을 냈다. 시인이 평소 애송한 외국 시인 시집들로 꾸며진 '정현종 문학 에디션'(문학판) 시리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대표 시를 각각 번역한 시집 세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원서가 아닌 영어 번역본을 중역(重譯)한 것이지만 정 시인의 감성적 해석과 우리말 감각 덕분에 매끄럽게 읽힌다. 각 시집에는 정 시인이 육필로 쓴 감상문과 직접 그린 세 시인의 초상화도 실렸다.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정현종 시인.

'정현종 문학 에디션' 시리즈의 첫 권인 '정현종 시인의 사유가 깃든 릴케 시 여행'은 릴케의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를 비롯해 스무 편을 담고 있다. 릴케의 시 '산보'가 우선 눈길을 끈다. '내 눈은 벌써 밝은 언덕에 닿는다/ 들어선 길을 멀리 앞질러 가면서./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붙들린다;/ 그건 그 내부의 빛을 갖고 있다, 먼 데서도-'. 정현종 시인은 릴케와의 영적(靈的) 교감을 담아 짧은 감상문을 달았다. "이 내면적 인간은 오감으로 느낀 것을 즉시 내면화한다. 그리고 그의 교감은 깊고 깊으며 한없이 광활하다. 그 속에서 우리가 오늘날 거의 몽땅 잃어버린 사물의 신비는 살아나고 세계는 무한 쪽으로 열린다. 그에게 세계는 바깥이 아니다." 릴케는 '참된 노래는 다른 숨결이다, 무(無)를 둘러싸는./ 신(神)의 돌풍. 한 바람'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정 시인은 "오래전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다른 숨결'이 돌풍처럼 불어왔다고나 할까"라고 회상했다.

릴케의 실제 모습.

파블로 네루다는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칠레 시인이다. 정 시인은 '네루다 시선(詩選)'을 비롯해 네루다 시 번역본을 다섯 권 낸 바 있다. 그 공로로 2004년 칠레 정부로부터 네루다 메달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 낸 '정현종 시인의 사유가 깃든 네루다 시 여행'은 지금껏 낸 번역 시집 중에서 골라낸 작품들을 실었다. 네루다는 남녀의 사랑을 자연 풍경에 빗대 생기(生氣)와 관능이 넘치는 언어로 노래했다. '아, 소나무 숲의 광활함, 부서지는 파도 소리,/ 천천히 빛들의 번쩍임, 외로운 종소리, 네 눈 속에 떨어지는 황혼/(…)/ 그렇게 깊은 시간 속에서 나는 보았다, 들판에서/ 밀의 귀들이 바람의 입속에서 울리고 있음을.' 정 시인은 "사랑할 때는 광활하지 않은 게 없다"며 마지막 시구에 대해 "에로티시즘의 시적 표현 중 한 극치가 아닐까 한다"고 감탄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이 낳은 시인이자 극작가였고, 네루다의 친구이기도 했다. 정 시인은 "로르카의 시는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붙이고 모든 세포를 새롭게 샘솟게 한다"며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로르카는 '내 가슴 속/ 오 이 진동!/ 두려움 없이,/ 나는 멀리 가리/ 에코처럼'이라고 노래했다. 정 시인은 "시인의 가슴이라는 악기가 강 위의 모기들이나 바람 위의 새들에 의해 진동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그 진동 속에 세계는 무한한 것이 되고 만물은 내통한다"고 촌평했다.

정현종 시인이 릴케의 부리부리한 눈을 강조해 직접 그린 초상화.

정현종 시인은 "번역은 먼 데 서 온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즐겨 인용해왔다. 정현종은 좋아하는 외국 시인들을 번역하면서 영혼의 포옹을 나눠 왔다. 그가 번역한 시인들은 대개 '자연 만물과의 교감'을 예찬했다. 그것은 정현종 시학(詩學)의 핵심이기도 하다. 정현종의 번역 시집은 언어의 경계를 넘어선 시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시인들의 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