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화낙(FANUC)은 일본 기업 가운데 드물게 방문 취재를 거부한 곳이다. 정밀 공작 기계를 만들면서 영업 이익률이 40% 넘는 우량 기업이다. 갤럭시6나 아이폰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철판을 매끄럽게 깎아 주는 기계의 세계시장을 80% 점유하고 있다. 화낙이 납품을 거부하면 스마트폰 생산은 멈추고 만다는 말이다.

이 회사가 삼성처럼 헤지펀드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읽었다. 석 달여 전이다. 헤지펀드 서드포인트(Third Point)가 화낙을 공격한 방식은 엘리어트가 삼성에 했던 것과 똑같다. 올 2월까지 화낙의 주식을 매입하고, 4월에는 대표단이 후지산 자락에 있는 화낙 본사에 직접 찾아갔다. 주가를 올리고 배당을 늘리라고 압박했다.

화낙의 대응은 삼성과는 정반대였다. 2주 뒤 곧바로 투자자 설명회를 열고 앞으로 5년 동안 이익이 나면 최대 80%까지 주주들에게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서드포인트는 공격을 거기서 멈추었다. 화낙은 창업자의 손자가 3대(代) 후계자로 성장하고 있지만 주주들의 불평을 묵살하지 않았다.

우리 재벌들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꼭 매를 맞아야 쓴 약을 삼킨다는 점이다. 현대자동차는 한전 부지 값으로 10조원이 넘는 돈을 정부에 헌납하다시피 한 뒤 외국인 주주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그때서야 주주들 의견을 경영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하고 후속 조치를 취했다. 삼성도 헤지펀드의 폭격을 받고서야 주주들에게 수박, 케이크를 돌리지 않았던가.

이런 오만함이 전적으로 오너 독주(獨走) 체제에서 비롯된 못된 버릇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총수의 1인 독재 통치가 주변의 몰매를 불러오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한다.

지난 1년 새 생중계되고 있는 재벌가 막장 드라마를 보라. 부모 형제가 뒤얽힌 효성그룹의 소송전부터 시작해 대한항공 오너의 딸이 저지른 땅콩 회항 소동을 거쳐 이번엔 롯데에서 대폭발이 발생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내쳐도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유혈극이다. 재벌 기업이 나라 경제의 성장을 주도한다는 믿음은 어느새 무너지고 있다.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며 재벌가의 '근친(近親) 전쟁'에 넌더리를 내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올여름엔 유독 재벌들만 이러는 게 아니다. 성장 시대의 주도 세력들이 동시에 몰락하는 합동 쇼를 보여주고 있다. 성장 계획을 이끌어왔던 관료 집단, 성장 전략을 뒷받침해오던 정치 집단도 지난 두세 달 사이 모두 밑천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국회는 자신들이 3분의 2 이상 찬성표로 만들었던 국회법 개정안을 대통령이 거부하자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입법부의 자해(自害) 행위다. 자신을 해칠 정도로 앞뒤 분간을 못하는 정치인들이 엉터리 입법으로 기업과 국민을 얼마나 괴롭히고 해치고 있는지 제대로 알 턱이 없다.

관료들의 올여름도 유별나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소동을 거치며 공무원 조직은 상처를 치료하기는커녕 키우는 것으로 이미지가 바뀌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질병관리본부가 조직을 키우고 예산을 늘려보려고 나서는 것을 보면 관료 집단의 무한 팽창 욕심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성장 시대에는 대통령이 무대를 내주고 관료가 배역을 정하면 국회가 박수를 치고 재벌 기업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돈을 벌었다. 지금의 정치는 박수 값을 챙기는 데만 열심이다. 관료는 제 앞길도 못 가린다. 재벌은 서로 자기가 무대에 오르겠다고 집안 싸움이 뜨겁다. 정치·관료·재벌이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아무리 4대 개혁을 외친들 흥행이 될 턱이 없다.

광복 70년 올해는 성장의 역사가 재평가된 해이다. 영화 '국제시장' 덕분에 어르신들이 이뤄놓은 경제성장의 열매에 무지갯빛 조명이 쏟아졌다. 언론들은 70년의 성취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어르신 세대가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어볼 만하다. 이런 잔치 분위기에서 성장 시대를 이끌던 엔진들이 한꺼번에 덜컹거리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나라를 이끌어갈 엔진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새것으로 갈아 끼우지 않으면 안 된다. 대기업에서는 무능한 총수나 그 가족은 경영에서 배제시키고 능력이 있는 전문 경영인들이 주인공 배역을 맡아야 할 때가 됐다. 관료 조직도 신분 보장 제도를 폐지하고 몇몇 글로벌 기업들이 하는 것처럼 해마다 5%씩 물갈이해야 한다. 정치권에도 뇌물에 찌든 불순한 인물을 걸러내고 건강한 비전을 가진 전문가들이 들어가야 한다.

성장 시대 주역들은 그동안 쌓아올린 탑(塔)을 자랑하고 있을 때만은 아니다. 누구보다 중년·노령층의 각성이 절실하다. 70년 성장 궤도를 달려온 기관차는 겉은 화려해도 속은 썩고 녹슬었다. 이대로라면 불량 엔진을 아들·손주에게 물려주게 된다. 성장 엔진의 교체·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