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천(76) 민주당 전 대표가 4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1938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61년 사시에 합격, 이후 2년을 판사, 20년을 검사로 활동했다.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민당 소속으로 고향에서 처음 당선됐고, 이후 5선(13·14·15·16·18대) 의원을 지냈다.

4일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박상천 전 민주당 대표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추모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율사 출신에 토론을 즐기며 때론 대들기도 했던 그를 아꼈다. 당 대변인, 원내총무에 이어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법무장관에 기용했다. 김 전 대통령 앞에서도 담배 피우며 토론하던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논쟁 사안에 대해선 상대에게 "첫째, 둘째…"로 시작하는 어법으로 설득했다. 주요 법안 통과를 주도해 '법안 제조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와 동갑에다가 대학, 사시 합격, 정치 입문(1988년) 시기까지 같은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여야 '명(名)대변인' 시대를 열었다. 박 전 의장은 빈소를 찾아 "난 한 마리 짝 잃은 거위" "난 (고인의) 맞수가 아니라 하수"라고 했다.

박 전 대표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야권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갈라설 때 민주당을 지켰다. 이때의 선택 때문에 일부 강경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여당에서 하루아침에 소수파로 전락한 민주당을 이끌던 그는 2004년 총선에서 '탄핵 역풍'에 무너졌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야권이 통합민주당으로 재편된 후에는 손학규 전 대표와 공동대표로 민주당을 이끌었다. 2008년 광우병 시위 때는 장외 투쟁보다는 국회를 통한 입법(立法)을 강조했다. '구(舊) 민주계'라는 한계 때문에 국회 부의장 경선에서 낙선했고,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며 정계를 은퇴했다.

1996년, 1999년, 2000년 세 차례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를 지낸 그는 야당 시절에 폭력과 거리 투쟁보다는 대화와 의회를 강조한 합리적 의회주의자였다. 2008년 한·미 FTA로 국회가 폭력으로 얼룩졌을 때도 투쟁일변도 노선을 비판했다. '국회선진화법'도 그가 처음 제안했다. 하루 2갑 이상 담배를 피웠던 애연가였는데, 금연을 권하던 후배들에게 "난 뻐끔 담배여"라며 이해를 구했다.

4일 빈소에는 여야(與野) 정치인의 발길이 이어졌다.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우리 당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분"이라고 말했다.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성실성과 노력, 실력을 높이 평가했던 분"이라며 이희호 여사의 조전(弔電)을 전달했다. 여권에선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빈소를 찾았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조의를 표했다. 여야는 함께 애도했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 대변인은 "소통하는 정치와 법치주의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고 했고, 새정치민주연합 김성수 대변인은 "강직한 성품과 날카로운 논리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유족은 아내 김금자(65), 딸 유선(SBS)·민선(제일모직), 아들 태희(SK텔레콤)씨와 사위 김욱준(검사), 김용철(의사)씨가 있다. 가수 박진영씨가 5촌 조카다. 빈소 서울성모병원. 발인 6일. (02)2258-5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