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 열사들이 중국에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은 한·중 양국 모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일(한·중 청년 자전거 대장정)이야말로 (앞으로) 남북이 함께 추진해야 할 사업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운동가 운암(雲巖) 김성숙 선생(1898~1969)의 아들 두젠(杜鍵·82)씨는 2일 본지 인터뷰에서 "38선이 한반도를 가르기 전까지 항일 운동에 대한 조선인과 중국인은 한마음이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두씨는 "한·중 청년 자전거 대장정 같은 활동이 앞으로는 북한과도 연계하는 장기 사업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김성숙 선생과 중국인 아내 두쥔후이(杜君慧·1904~ 1981) 여사의 세 아들(두첸·두젠·두롄) 중 둘째다. 두씨는 중국 중앙미술학원 교수와 중국미술협회 이사를 지낸 뒤 은퇴해 지금은 베이징에 살고 있다. 두씨는 아버지 김성숙 선생이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충칭 임시정부 인근에서 유년을 보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이 해방되던 날 나는 열두 살이었다. 이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오로지 임시정부 일에 몰두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운암 김성숙 선생과 두쥔후이 여사의 둘째 아들인 두젠씨(위). 아래는 김성숙(뒷줄 오른쪽) 선생과 아내 두쥔후이 여사가 중국 충칭에서 큰아들 두첸(앞줄 오른쪽), 둘째 두젠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김성숙 선생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봉선사 승려 신분으로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좌익 성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소속됐던 그는 1942년 충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의 곁에는 항상 중국인 아내 두쥔후이 여사가 있었다. 두젠씨는 "두 분은 항일 투쟁 중 광저우 중산(中山)대학에서 만났다"며 "어머니는 이후 아버지와 함께 임시정부 활동에 매진했다"고 말했다. 두 여사는 당시 충칭·우한(武漢) 지역 공산당 대표이자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의 최측근인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도 친분이 있었다. 학계에서는 김성숙 선생과 두 여사의 결혼을 저우언라이가 중매했다는 얘기도 있다. 두 여사는 임정에서 한·중 양국의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두 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세 아들과 임정 주변의 고아들까지 살뜰히 챙겼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 사학자들은 두 여사를 '임시정부의 중국인 어머니'라고 불렀다.

해방 직후 김 선생은 급히 한국으로 들어가면서 두 여사 및 세 아들과 헤어지게 됐다. 6·25 전쟁 이후 한·중 관계가 단절되면서 김 선생과 중국의 가족들은 영영 만나지 못했다. 두씨는 이때 자신의 성(姓)을 김씨에서 두씨로 바꿨다. 첫째 두첸(85)씨는 광저우 음대 교수로 일했다. 광복 당시 두 살이었던 셋째 두롄(72)씨는 중국 공산당 고위직인 국가정보센터 주임이 됐다. 두젠씨는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펼쳐지는 이번 사업을 통해 남·북한이 통일을 이루는 길을 찾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