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파리특파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달 세 가지 일 때문에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았다. 우선 '3차 구제금융'을 대가로 그리스에 너무도 가혹한 긴축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외신은 "유럽을 위기에 빠뜨렸다"고, 내신은 "무자비한 독일의 이미지를 되살렸다"고 비판했다. 여론조사에서도 '3차 구제금융안'에 대한 반대 의견이 찬성보다 많았다.

또 하나는 TV 토론 중 "미래가 없다"며 호소하는 열네 살 팔레스타인 출신 난민 소녀에게 "모두를 받아 줄 순 없다"고 답해, 결국 소녀를 울게 한 일이다. 독일 최대 주간지 슈테른은 메르켈의 얼굴 사진에 '얼음 공주'라는 제목을 붙여 이 사건을 보도했다. 끝으로 미국의 독일 내 불법 도청 활동에 대해 메르켈이 사실상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의혹과 관련, 독일 의회가 메르켈을 고발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메르켈은 그 일들에 대해 제대로 해명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3주간 예정된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천하의 메르켈도 이쯤 되면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듯했다. 하지만 지난 30일 나온 독일 ARD 여론조사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메르켈 업무에 대한 독일 국민의 지지도 67%를 기록했다. 소폭이긴 하지만 한 달 전 같은 조사와 비교해 오히려 1%포인트 오른 것이다. 상승 이유를 분석한 기사를 찾지 못했다. 대신 독일의 유명 정치평론가인 올라프 보엔케의 분석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독일인들은 원칙 준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팔레스타인 소녀 앞에서 (당장 듣기 좋은) '오케이(OK)'라고 말하는 대신에 소녀를 위해 법을 먼저 바꾸기를 원한다."

독일 정부는 이미 법을 개정해 8월부터 독일 사회에 잘 적응한 청소년들은 새로운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실제 메르켈은 보수인 기독민주당(CDU) 출신이면서도 2005년 집권 후 지속적으로 이민자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왔다. 독일 국민들은 말보다 메르켈의 실천에 더 믿음을 보낸 것이다. 팔레스타인 소녀조차도 "총리의 대응은 공정했고, 정직한 그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런 국민적 지지가 국제 무대에서 메르켈 리더십의 든든한 배경이 됐다.

특정 국가의 국민성을 한두 마디로 규정하거나, 다른 나라와 우열(優劣)을 비교하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3차 구제금융 협상장에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메르켈로부터 굴욕적인 결과를 받아들이게 한 것은 결국 그리스 국민의 선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총선에서 그리스 국민들은 외신으로부터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깨끗한 신진 정치 세력이라고 평가받던 정당 '토 포타미'에 300석 가운데 단 7석밖에 주지 않았다. 대신 '긴축 거부'라는 치프라스의 달콤한 제안을 선택했다. 부패한 기성 정치권을 개혁할 기회를 스스로 잡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고 독일의 국민성이 마냥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메르켈은 지금 그리스인에게 긴축하고 절제하는 독일식 삶을 강요하고 있다. 이를 주변 유럽국들은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뿐 아니라 '유럽을 독일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지도자를 만난 독일인의 우월 의식이 유럽에 몰고 온 두 차례의 전쟁을 기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