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희동
도심이 가까운데 새소리 지저귄다
인테리어 좋은 곳은 많지만
사람 향기 좋은 곳은 드문데…
연희로 11가는 그런 곳이다

그저 동네 마트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외국 유명 식재료 상점에 온 듯 제품 구성이 다채롭다. 연희동의 랜드마크인 ‘사러가 쇼핑센터’. 혹자는 강북의 ‘SSG(신세계푸드마켓·고급 식품관)’라고 부른다. 주말이면 외국인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외국인에게 특히 사랑받는다.

좀 지쳤던 것 같다. 새로 뜬다며 찾았던 곳들이 어느새 머릿속에서 중첩되기 시작했다. 창고를 개조하고, 공장 지대를 단장하고, 예스러움을 현대적으로 조화시킨 공간들. 철재 소품이나 노출 콘크리트를 동원한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가게들은 '복제'한 듯 어딜 가나 하나씩 꼭 있다.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며 내뱉었던 경탄은 점차 '아'라는 짧은 감탄으로 바뀌고, 어느 순간 '또'라는 탄식으로 탈바꿈했다. 주말만 되면 차로까지 도열하는 사람 물결은 가끔, 현기증마저 유발했다. 출사족 카메라 시선을 피해 다니는 고단함 속에 통행의 자유마저 뺏긴 느낌이다. 자본의 확산과 발달의 평준화라는 측면에선 박수받을지는 몰라도 남다른 희소성을 찾는 이들에겐 슬픈 현실일 뿐이다.

그때 마주하게 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은 어쩌면 이런 한탄에 대한 일종의 위로다. '다름'에 대한 발견이었다. 용산구 한남동과 이태원에 이어 외국인 선호 주거 지역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인데, 색깔은 완전히 달랐다. 동네 대부분이 1종 주거전용지역인 데다 인근 초등학교·외국인 학교가 여럿 들어서인지 '유흥' 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때, 새소리가 귀를 잡는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소리다. 아니, 다른 곳서도 분명 새는 지저귈 텐데 사람이 만드는 소음에 묻힌 게다. 괜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연희동이 주목받는 건 연희로 11가 길 때문이다. 최근 1~2년 사이 디자인 갤러리와 카페·레스토랑이 속속 들어섰다. 지금 가장 '뜨거운' 동네인 연남동의 연장선상에서 주목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횡단보도 하나 건너면 서로 닿는 거리에, 화교가 많은 것도 공통점이다. 실상 연남동이란 동네도 연희동에서 떼어져 나온 게 아닌가.

한배에서 나와도 이렇게 다를 수 있나 보다.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곳 주민들은 지하철과 바로 연결되지 않는 '교통의 불편함'이 역설적으로 동네의 느낌을 보존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미래학자 리처드 왓슨의 말처럼 트렌드는 역트렌드를 동반하지 않는가. 빠르고 간편한 걸 찾다가도 느림의 미학을 원하고, 기계적인 화려함에 매료됐다가 히피적인 자연 속에 파고드는 것처럼 말이다. 홍대 인근임에도 홍대 상권 영향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희귀함이 연희동의 독자성을 지켜내고 있었다.

연희동에서 39년간이나 자리를 지킨 '사러가 쇼핑센터'는 그 세월만큼이나 연희동의 DNA를 그대로 담고 있다. 고급 수퍼마켓 앞 미제 상품 판매대는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연희동의 한 단면이다. 30년 단골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 흔한 대형 마트 하나 진입하기 어렵다. 연희동에 새 가게를 내려던 유명 셰프에게 이곳 토박이 셰프들이 이런 조언을 했다고 한다. "TV에 좀 나오고 인테리어 신경 썼다고 다 됐다고 생각 마라. 다른 곳에선 손님 끌진 몰라도 여기선 몇 달 버티기 힘들 거다. 자부심이 다른 동네다. 매일 출근하고 전력 다해 주민 마음 잡을 각오 없으면 생각부터 접어라."

그 동네가 뜨는 건 몇몇 유명한 셰프나 독특한 인테리어 감각의 아티스트가 전적으로 좌우한다 생각했다. 그들 명성을 좇아 그 동네를 그렇게 다녔으니까. 생각해보니, 앞뒤가 바뀌었다. 사람과 동네는 동떨어진 게 아니다. 셰프와 아티스트의 발을 잡은 건 동네 냄새고, 사람의 향기이며 분위기고 정이다. 먼저, 그 동네의 매력에 반해 자리를 잡은 게다. 단지 가격만으로는 부족하다.

연희로 11가 길을 지나 작은 공원에 닿는다. 40년 된 시민 아파트가 철거된 뒤 2006년 조성됐다. 궁동 공원. 궁이 있던 터란 뜻과 더불어 산이 마을을 자궁같이 포근히 감싸 안은 형상을 딴 말이란다. 엄마의 품. 숨이란 걸 불어넣어 준 생명의 공간. 연희동은 그랬다.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연희동 Hot Place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연희동의 골목길. 브런치 카페 뱅센느의 따스한 불빛은 저녁 산책길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된다.
목란의 ‘탕수육’.
작은나폴리의 ‘반반 피자’.
피터팬제과의 ‘건강빵’.
몽고네의 ‘타르타르’.

몽고네

신사동 '그라노'와 이태원 '소르티노스' 등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총지배인으로 일했던 몽고 대표가 그라노에서 함께 일하던 루피 셰프와 합심해 문을 열었다. '몽고'는 대표의 별명. 성산로 입구 쪽으로 향한 골목 초입에 위치했는데 동네를 딱 들어서는 순간 '여기다' 싶었단다. 파스타와 뇨끼 등 기본 메뉴는 물론 트뤼프 오일을 가미한 버터소스 요리 등 각종 창작 요리가 입맛을 돋운다. 계절별로 특선 메뉴가 있는데 여름엔 어란 성게 파스타를, 가을엔 어란 고노와다 파스타를 내놓는 식이다. 제주도 조랑말 농장에서 직송한 말고기 타르타르와 드레싱, 피스타치오를 곁들인 전채요리(2만원)는 말 그대로 싱싱한 에너지가 입안에서 춤춘다.
주소 연희동 192-29 | 문의 (070)8623-0680

디자인 프리마켓

1층엔 카페와 숍이 있고, 2층·3층의 갤러리 소유에선 회화·사진·공예 등의 작품이 전시된다. '아카데미 작당'에선 디자이너나 작가들이 직접 강사로 나서 고객과 소통한다. 일반 소비자들은 디자이너의 작품을 구매하고, 캘리그래피나 가죽공예, 천연 화장품 제조법 등을 배울 수 있다.
주소 연희동 132-41 | 문의 (070)7729-0041

매뉴팩트 커피

카페라고 하기엔 협소한 데다 화려한 간판 하나 없고, 생긴 지도 1년 남짓인데 벌써 연희동 사랑방이 됐다. 커피 마니아인 김종필·김종진 형제가 운영한다. 차가운 물에 커피를 내린다고 해서 '콜드 브루'라고 한다. 제조 허가도 정식으로 받았다. 실험실 같은 작업실이 내부에 있다. 김종필 대표는 "상업화된 도심에서 아직 순수한 느낌의 동네여서, 좋은 커피를 제대로 만들자는 우리 철학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핸드드립커피 3000원.
주소 연희동 130-2 | 문의 (02)6406-8777

76㎡

연희동의 명물 129-11 카페 밑에 있는 편집 숍이다. 남성 구두 '바이바또마스티' 이도명, 안경 및 선글라스 '토모아이웨어'의 이정귀, 여성 플랫슈즈 '토레로' 이경묵 등 3명의 디자이너가 의기투합해 문을 연 사무실 겸 쇼룸이다. 카페 129-11이 번지수를 그대로 이용했다면 76㎡는 면적을 나타낸다.
문의 (02)3785-0620

작은 나폴리

사진작가 출신 류창현 대표의 감성이 돋보이는 곳. 화덕 피자는 400도 이상 온도에 구워 쫀득한데 고르곤졸라 유자 피자(1만5000원)가 별미다. 마르게리따 피자와 반반 메뉴(1만5000원)로 주문할 수 있다. 로제 소스에 성게알, 명란, 계란 노른자가 들어 있는 리치오 디 마레(1만4000원)는 뒷맛이 매콤한 것이 중독성 있다. 1층의 꽃집 벤자민&데이지도 한번 둘러보면 눈이 즐겁다.
주소 연희동 133-30 | 문의 (02)306-8859

[우리집 장독대는 프로방스 풍… 동네 마트에선 '루콜라(피자 등에 얹는 향긋한 채소)' 삽니다]

["여유가 살아 숨쉬는 이 골목, 떠나기 싫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