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어쩌다 집'
한의사·디자이너·건축가 등 1인가구 6명 사는 다세대주택

혼자 사는 '나 홀로족'이 늘고 있다. 이들에게 집은 잠만 자는 곳에 가깝다. 이불에서 빠져나와 일터로 향하고, 다시 이불로 향한다.

지난 3월 색다른 취향과 옷가게가 모여 있는 서울 연남동에 들어선 5층 다세대주택 '어쩌다 집'(대지 면적 204㎡, 연면적 409㎡)은 도심에서 급증하는 1인 가구에 '가족'을 선물한 집이다. 집에 이름 붙은 것도 신기한데 그 이름이 '어쩌다'라니 어쩌다 이런 집이 생긴 걸까.

‘어쩌다 집’에 모여 사는 ‘식구’들이 베란다로 나왔다. 사진에 보이는 꼭대기층은 복층 원룸, 아래 왼쪽은 셰어하우스다. 입주민들이 베란다에서 서로 얼굴 보고, 가운데 뚫린 계단으로 자유롭게 오간다.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가족처럼 살 수 있는 재미있는 집을 만들어 보자 했지요." 이 집을 설계한 건축가이자 집주인인 이진오(45·SAAI건축 공동대표·사진)씨와 그의 아내 신은경(43·어린이책 디자이너)씨가 이구동성 말했다. 두 사람은 인천 34평 아파트에 살다가 서교동 24평 빌라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으로 왔다.

1인 가족 모여사는 '어쩌다 집' 식구들.

1인 가구 실험 주택 종합세트 같다. 복층 원룸 2개, 원룸 3개, 방 셋인 셰어하우스(주방, 거실, 욕실은 함께 쓰고 방은 따로 쓰는 형태) 1개가 모여 있다. 총 입주민은 8명. 이씨 부부 말곤 모두 혼자 산다. 직업은 한의사, 디자이너, 편집자, 건축가 등이고 나이는 31~47세다.

"부모님과 형제 근처에 살았어요. 솔직히 가족이 늘 편치만은 않아요. 언제 결혼하느냐, 언제 애 낳느냐, 언제 둘째 낳느냐. 시시콜콜 간섭이 계속되지요." 오죽하면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까지 했을까. "가족끼리도 거리가 필요하다 싶었지요. 그런데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살아보고 싶었어요."

건축가 이진오

살던 빌라 보증금과 인천 아파트 판 돈, 은행 대출금을 합쳐 연남동에 땅을 샀다. 설계보다 우선 한 건 '가족 공모'였다. "모이고 공유하면 일상이 더 재미있고 풍요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어쩌다 집'에 함께 살고 싶습니다." SNS에 입주자 모집 글을 띄웠다. 이렇게 모은 30명 중 8명을 골랐다. 두 번 설명회를 열어 이들 요구를 설계에 반영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매스(덩어리)를 크게 두 개로 나누고 복도를 가운데 낸 형태다.

'어쩌다 집' 1층에 있는 식당 '아까 H'. 이 건물에 입주한 1인 가구들의 주방 같은 곳이다.
'어쩌다 집' 1층에 있는 식당 '아까 H'. 이 건물에 입주한 1인 가구들의 주방 같은 곳이다.
어쩌다 집 401호의 디자인아이 미팅룸. 건축가 아내의 사무실이다.
'어쩌다 집' 401호 디자인아이에 있는 천장 공간
'어쩌다 집'에 있는 작은 원룸.
'어쩌다 집' 셰어하우스에 있는 공용 주방.
'어쩌다 집' 복층 원룸의 다락방.
1인 가구를 위한 다세대주택 '어쩌다 집'의 주출입계단. 집 이름이 붙어 있다.
1인 가구를 위한 다세대주택 '어쩌다 집'의 복도. 입주민들끼리 소통하기 편하게 만들어 뒀다.
연남동 골목길에 위치한 1인 가구를 위한 다세대주택 '어쩌다 집'. 5층짜리 하얀 건물이다.
연남동 골목길에 위치한 1인 가구를 위한 다세대주택 '어쩌다 집'. 5층짜리 하얀 건물이다.

이들은 단지 세입자가 아니다. 집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다. 일상을 함께 나누는 게 입주민들의 의무다. 1층에 일부러 레스토랑('아까H')을 뒀다. 식사를 대충 때우는 1인 가구를 위한 배려이자 사랑방 공간으로 기획했다. 진짜 식구(食口)가 된 셈이다. "저녁이면 남는 식재료 가져와서 떡볶이 만들고 볶음밥 만들어 같이 먹어요. 명색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인데(웃음)." 반(半) 가족이 된 '아까 H' 이현승 사장이 웃는다. "요즘 제 고민과 일상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어쩌다 집' 사람들이에요. 혼자 사는 게 마냥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같이 사니 새로운 재미가 있어요." 셰어하우스에 사는 디자이너 이현철씨가 말했다.

쓰는 것보다 버리는 게 많아 안 샀던 원 플러스 원(1+1) 상품 앞에서 기꺼이 지갑을 연다. '어쩌다 집 가족'과 나눠쓸 요량이다. 입주자 단체 카톡방에선 윗집 베란다 호박과 아랫집 베란다 상추가 이슈다. 진짜 식구들은 잊고 사는 소소한 대화가 '어쩌다 만나 어쩌다 가족이 된 사람들' 사이에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