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리듬체조 인생에서 손연재(21·연세대)는 실패를 겪어본 적이 별로 없다. 16세 여고생 시절 세계선수권 32위로 출발해 지난 12일 광주 유니버시아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르기까지 '후퇴 없는 전진'만을 계속해왔다. 이번 월드컵에서 동메달 1개를 땄다면 다음 월드컵에선 반드시 동메달 2개를 따내거나 은메달을 손에 넣었다. 부동의 세계 1·2위인 러시아 에이스들이 불참한 대회나 아시아 대회에선 예외없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손연재는 올해 21세, 대학교 3학년이 됐다. 여전히 '리듬체조 여왕'이나 '세계 랭킹 1위'는 아니지만,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면서 소녀티를 벗고 숙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온 국민이 지켜보며 흐뭇해했다. 선수 수명이 짧은 종목 특성상 그는 내년 은퇴를 계획 중이다. 세계 정상급 리듬체조 선수들이 훈련하는 러시아 노보고르스크 센터에서 그는 어느덧 둘째로 나이 많은 선수가 됐다.

광주 유니버시아드 3관왕에 오른 손연재는“선수 생활 중 한 번이라도 시상식장에서 태극기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듣는 것이 목표였는데 생각보다 빨리, 여러 번 이루게 돼 정말 기쁘다”고 했다.

손연재가 광주에서 올라온 다음 날인 16일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 손연재는 자신의 후원사인 노스페이스 주최 '대한민국 희망원정대'를 격려 방문했다. 전남 보성에서 19일간 500㎞를 걸어 서울에 도착한 대학생 93명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응원했다. '젊음·도전·열정'을 주제로 한 대학생 국토 순례 행사에 그는 가장 잘 어울리는 초대 손님일 것이다. 반짝이는 옷을 입고 화려하게 리본을 흔들지만 그 뒤에는 숨은 피땀과 눈물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 유니버시아드 3관왕(개인종합·후프·볼)을 축하한다. 대학생들만 모인 대회 분위기는 어땠나.

"경기가 주는 긴장감은 다를 바 없었지만 선수촌 분위기는 활기가 넘쳤고 즐거웠다."

―러시아 에이스 두 명이 불참한 이번 대회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금메달을 땄다. 지금까지 우승이 예상됐던 대회(아시아선수권·아시안게임 등)에서 금메달을 놓친 적이 없다.

"나를 오늘까지 끌고온 것은 간절함 하나였다. 이번 대회 역시 금메달을 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어떻게든 잡고 싶었다. 발목이 아팠지만 진통제를 맞아가며 훈련량을 늘렸다."

―우승 소감으로 '그동안 나 자신이 아닌 느낌이었는데 스스로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했는데.

"처음 국제 대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땐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행복했다. 스스로 내 연기를 즐기고 그 감동을 관중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나만이 가진 색깔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작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뒤로는 동기 부여가 잘 되지 않았고 성적 부담이 겹쳐 기쁨을 잃어버렸다."

손연재는 이번 대회 개인종합 곤봉 경기가 끝나는 순간 환희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온몸에 소름 돋는 기분을 오랜만에 다시 느껴봤다"며 "더 이상 준비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손연재는 "결과를 떠나 리듬체조를 하는 이유를 되찾게 해준 이번 대회가 깊은 의미를 남겼다"고 했다.

손연재가 16일 서울 동국대학교 앞에서 국가대표 선수단·대한체조협회 공식 후원사이자 자신이 홍보 대사로 활동하는 노스페이스 주최‘대한민국 희망원정대’대원들을 만나 하이파이브를 하며 격려하고 있다. 올해로 12회를 맞이한 대학생 국토 순례에 참가한 원정대원 93명은 전남 보성에서 서울까지 501㎞를 도보로 완주했다.

―발목 상태는 어떤지.

"오래전부터 아팠지만 올 시즌 자꾸 재발했다. 쉬기만 하면 낫는다는데…. 9월 세계선수권과 내년 올림픽을 앞두고 관리를 잘해야 하는 상황이다."

―내년 올림픽을 은퇴 무대로 생각 중이라고 밝혔다.

"스물한 살밖에 안 된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웃지만 17세 선수들의 유연성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노련함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선수 생활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고 생각한다."

―리듬체조 불모지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 왔다.

"오히려 '최초'라는 수식어 때문에 자유로웠다. 비교당해야 하는 상대가 없었고, 작은 것을 이뤄내도 처음이라는 이유로 큰 관심을 받았다."

―선수 생활 내내 비난과 악플의 대상이 됐다. 그래도 리듬체조를 하는 것이 행복했나.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기대를 건다면 부담감에 더욱 괴로울 것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내게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좋은 결과를 내는 게 오히려 쉬울지 모른다. 나는 매트에 나가 내 연기를 하고 내 점수를 받는다. 그 이후의 모든 평가는 각자에게 맡길 뿐이다."

―'17년 리듬체조 인생'이 가르쳐준 것은 뭘까.

"해가 갈수록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점점 더 힘들었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더라. 나중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마음 하나로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