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전 코소보 북부 미트로비차시(市)로 차를 타고 달렸다. 수도 프리슈티나를 벗어나자 나지막한 산과 초원, 주황색 지붕의 야트막한 집들이 이어졌다. 1998년 '코소보 사태'로 주민 1만5000여명이 목숨을 잃고 30만여명의 난민이 발생했던 코소보의 겉모습은 평온했다.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요구했던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을 세르비아 정부군이 대량 학살하면서 격화된 내전은 16년 전 끝이 났다. 그러나 코소보는 여전히 민족 갈등과 분열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시간 30분을 달려 미트로비차 인근 알바니아계 주민이 모여 사는 차브라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에 도착했다. 코소보 사태 이후 두 민족은 서로 구분된 지역에 살고 있다. 차브라 마을은 세르비아계 거주지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긴장감이 높은 지역이다. 다리 건너기 전까지는 세르비아계, 다리를 건너면 알바니아계 지역이었다. 동행한 현지인은 "세르비아계 사람들은 여전히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해 만들어진) 코소보 정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 발행 번호판을 단 차가 여기 오래 있으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며 주변을 경계했다.

7일 오후 코소보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알바니아계 학생 6명과 세르비아 학생 6명이 만났다. 원래 40여명이 활동해왔지만 이슬람 금식 기간인 라마단 중이라 일부만 참석했다. 세르비아계(앞줄 왼쪽에서 둘째)와 알바니아계 학생(맨 오른쪽)이 각각 민족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이들은 서로에게 결혼 풍습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차브라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 사드리 하사니(60·알바니아계)는 "제가 가르치던 아이 네 명이 2002년 이 강을 넘어 우연히 세르비아 마을로 들어간 적이 있다. 그중 세 명이 개를 끌고 쫓아온 세르비아인들을 피하려다 강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며 말을 꺼냈다. 그는 "부서진 집은 전쟁 후 다시 지었지만, 두 민족 간 벌어진 관계는 다시 잇지 못했다"고 했다.

전쟁 상흔은 아이들 세대로 대물림됐다. 방학을 맞아 한산한 리피안시 루보츠에 위치한 1층짜리 초등학교 건물 중앙엔 시멘트로 된 벽이 복도를 막고 있었다.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학생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학교에 다니는 타냐 스파시치(14·세르비아계)는 "세르비아 학생은 왼쪽의 작은 출입구, 알바니아 학생들은 가운데 문을 이용해 등교한다. 부모님이 알바니아인들은 위험하다고 해 서로 말도 섞지 않는다"고 했다. 시멘트 벽 왼쪽에선 세르비아 교사가 세르비아어로, 오른쪽에선 알바니아 교사가 알바니아어로 가르친다고 했다.

코소보 리피안시(市) 루보츠에 있는 초등학교 전경. 세르비아계 학생 10여명과 알바니아계 학생 100여명이 다니는 이 학교 건물 가운데에는 벽이 세워져 있다. 두 민족이 왕래할 수 없도록 양쪽을 나눈 것이다. 작은 문(왼쪽 점선)으로 세르비아계 아이들이, 정면에 보이는 정문(오른쪽 점선)으로 알바니아계 아이들이 등교한다.

그러나 이런 코소보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변화를 이끄는 건 아이들이다. 2002년부터 코소보에서는 '아동평화구축사업(Kids for peace)'이 시작됐다. 지역 정부·해당 학교장 협력 아래 16개 학교에 각각 '평화 클럽'이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3000여명이 클럽을 통해 상대 민족 학생과 만나 교류했다. 미국·영국·아일랜드·유럽연합이 지원해왔으며 2011년부터는 한국 월드비전이 지원하고 있다.

7일 프리슈티나에서도 알바니아계 학생 6명과 세르비아계 학생 6명이 모여 서로의 전통 의상을 비교하고 게임하며 어울렸다. 천진난만했다. 반목은 없었다. 모임에서 만난 필립 디미치(15·세르비아계)는 "알바니아계 학생들을 만나보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과거 역사가 모두 잊힐 수는 없지만 마음속 가득했던 증오 대신 미래에 희망을 갖게 됐다"고 했다. 알티나 데두시(14·알바니아계)는 "빨리 변화를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우리가 부모가 돼 자녀에게 증오 대신 평화를 전하면 언젠가 코소보에도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 믿는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들의 변화는 부모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세르비아계 슬라비샤 스파시치(49)의 가족 역시 세 딸의 권유로 알바니아계 주민과 함께하는 행사에 참석하면서 편견과 증오를 덜어낼 수 있었다. 스파시치씨는 "옛날에는 알바니아계 사람이 많은 마트에 장 보러 가면, 자녀들에게 위험하니 세르비아어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젠 큰딸이 그 마트에서 일하고 있다"며 "과거의 증오와 반목이 미래에 되풀이되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